1/15초, 느림의 미학

 

 

 

“속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는 것.
이 방정식에서 우리는 여러 필연적 귀결을 연역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 라고, 그가 발걸음을 빨리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더 이상 바라지 않음을.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역겨워 하고 있으며 스스로 기억의 그 간들거리는 작은 불꽃을 훅 불어 꺼버리고 싶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 밀란 쿤데라, <느림>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화두 중 하나는 ‘느림’이 됐습니다. 변화, 개혁, 진보, 속도, 경쟁, 선도, 선점…. 이런 말들이 한창 유행하던 90년대 중반 국내에 번역 소개된 위 책이 뜬금없이 던진 ‘느림’이란 말에 삶은 무조건 정신없이 앞으로만 뛰쳐나가야 한다고 믿던 저도 잠시 ‘아차’하며 멈칫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일상용어가 돼버린 ‘웰빙’도 이 느림의 미학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 희들은 ‘사진기자의 근무시간은 하루에 1분도 안된다’는 우스개 소리를 곧잘 하곤 합니다. 저희 사진기자들은 취재를 할 때 신문의 선명한 인쇄를 위해 주로 1/250초 이상의 고속 셔터로 촬영을 합니다. 1/250초로 250장 사진을 찍어봐야 실제 촬영시간은 1분도 안되기 때문이죠.

사진에 대한 정의는 참 많습니다. 빛의 예술, 순간 포착의 미학, 결정적 순간 등등…. 어쨌든 대부분의 사진은 찰나의 순간의 빛을 잡아 두는 것이겠죠.

< 1/15초가 재생하는 느림의 역동성>

아마 디카족 대부분들도 1/250초 ~ 1/60초 사이에서 셔터를 끊으실 거에요. 주로 완전자동모드(A)나 프로그램모드(P)로 촬영을 많이 하시는데, 이 경우 1/250초 ~ 1/60초 사이로 셔터가 세팅됩니다.
이 속도로 주로 세팅되는 이유는, ①너무 느리거나 너무 빠르면 햇빛 아래에서 조리개를 맞추기 힘들고 ②피사체가 특별히 크게 움직이지 않는 한 정지된 모습으로 선명하게 나오며 ③ 1/60초 이하는 손으로 들고 찍을 경우 흔들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하 지만 언제까지 이런 셔터스피드로만 찍어서야 진정한 고수라고 할 수 없지요. 사진을 다양하게 연출하기 위해서는 저속 셔터스피드를 간혹 이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느리게 세팅하면 지나치게 피사체가 흔들려 보이겠죠. 저는 1/15초를 권해드립니다.

1/15초는 손으로 들고 찍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한계선입니다. 물론 삼각대 같은 것을 쓰면 좋겠지만… 좀 귀찮잖아요? 그렇다고 1/15초를 아무나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디카테크닉#7]디카는 스포츠다?’에 이미 알려드렸듯 완벽하고 안정된 자세가 몸에 배인 디카족이라야 제대로 찍을 수 있는 셔터스피드가 바로 1/15초 입니다.

1/10 초 보다 느리게 되면 아무리 자세가 좋은 분이라도 조금은 흔들리게 됩니다. 1/15초는 손으로 들고 찍을 수 있는 최저 셔터 속도인데다가, 우리 주위에 움직이는 것들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역동성이 무척 느릿느릿하고 한적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죠.



< 사진1,2>는 모두 지하철 역에서 찍었습니다. 1/15초, 조리개 2.8 입니다. 같은 장소, 같은 세팅으로 찍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죠.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사진2>를 찍었습니다. 역으로 들어온 열차가 다음 역을 향해 반복된 전진을 힘차게 시작하지만, 사진에서 쳇바퀴 돌 듯 순환하는 지하철역 분위기 보다는 인적 드문 한적한 도심 풍경으로 보이지 않나요?
물론 플래시는 터뜨리지 않았구요. 아참, 1/15초로 찍기 위해서는 셔터우선식(S, Shutter Priority)이나 수동(M) 모드로 카메라를 세팅해야 하는 것은 아시죠?



< 사진3,4>도 모두 1/15초로 촬영된 사진입니다. <사진3>은 지나던 사람이, <사진4>는 탈춤꾼들이 ‘흐르는’ 영상으로 잡혔죠. 모두 1/15초가 아니면 잡기 힘든 사진입니다. 1/15초보다 빠르다면 움직임이 잘 재현되지 않을 것이고 1/15초보다 느리다면 손으로 들고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카메라가 많이 흔들리겠죠.
<사진4>는 플래시를 ‘후막동조’로 터뜨렸습니다. 셔터가 닫히기 직전 플래시를 터뜨려 움직이는 물체의 윤곽을 잡아두는 것이죠. 이와 비슷한 사진은 ‘[디카테크닉#28]플래시로 댄서잡기’에서 알려드린적 있죠.

 

 

글쓴이 : 동아일보 신원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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