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잘 알고있는 중국의 삼국지(위, 촉, 오) 의 삼국시대에 대한 자료가 필요해서 스크랩 해 뒀던 자료.
어디선가 스크랩 했었는데 출처가 기억나지 않네요 ㅠㅠ


6.1.1. 군웅의 할거와 삼국의 분립

황건의 난에 의해 한제국의 지배는 대타격을 받았다. 반란에 의해 살해된 지방관도 있었고 한왕조에 대항해 자립을 꾀하는 움직임도 등장했다. 한왕조는 병란에 대비해 각 주의 장관인 자사(刺史)를 목(牧)으로 바꾸고 중신(重臣)을 임명해 권한을 강화했지만, 오히려 지방분권의 형성을 조장하였다.. 189년에 영제가 사망하자 다시 환관과 외척 사이의 정쟁이 재개되었다. 외척인 하진(何進)은 일류 명족이었던 원소(袁紹)와 강족(羌族)의 반란을 성공리에 진압한 군벌 동탁(董卓)과 협력해 환관을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진은 실패하여 살해되었고, 원소는 환관세력을 일소하였다. 그러나 이를 기점으로 하여 각지의 군웅이 일어나 패권을 다투는 새로운 정치상황이 등장했다. 원소와 동탁, 조조(曹操)와 손견(孫堅) 등이 여타의 호족과 결합하연서 세력을 넓혀 군벌로서 전국을 분할하였다.

한의 황제는 이미 군벌에 대항할 힘이 없었고, 명목상의 황제일 뿐이었다. 동탁에 의해 옹립된 헌제(獻帝)는 동탁을 따라서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겼다. 그러나 동탁이 부하에게 피살되자 다시 낙양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은 완전히 폐허가 된 상태여서 이후 조조(曹操)에게 의지하였다. 군벌의 세력판도는 잇달아 바뀌었다. 조조는 200년에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전투를 치루어 격파하고 이어 전 화북을 거의 확보하였다. 손견은 유표와 싸우다 전사하였고, 그 아들 손책(孫策)은 강동을 평정하였지만 암살되어 동생 손권(孫權)이 뒤를 이었다. 원소측에 가담했다 패배한 유비(劉備)는 남쪽 형주(荊州)로 도망가 군사 제갈량(諸葛亮)을 만나 자립의 기회를 엿보았다.

208년 조조는 남하를 개시하여 형주의 유종(劉琮)을 항복시켰지만,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적벽(赤壁, 호북성 嘉魚縣 서쪽)에서 패배를 당했다. 이로써 강남지역의 병합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유비는 익주(益州, 사천성)으로 달아나 유장(劉璋)을 대신해 성도(成都)에서 자립하였다. 손권은 형주를 유비에게 빼앗아 강남지역에 판도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천하는 삼분되었고, 정립의 태세가 갖추어졌다.

216년 조조는 업( )에서 위왕(魏王)으로 봉해져 사실상의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지만 220년에 낙양에서 사망하였다. 조비(曹丕)가 뒤를 이어 낙양에서 선양의 형식으로 헌제의 양위를 받아 위왕조를 세웠다. 문제는 경제적인 부나 가문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한다는 새로운 관리임용방식인 구품관인법을 시행하여 관료를 육성하려 하였지만, 이미 각지에서 기반을 굳힌 호족세력이 오히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관직을 독점하였고, 황제권은 이에 따라 위축되었다. 이렇게 구품관인법을 계기로 관료기구에 편입되어 대대로 여러가지 정치상의 특권을 획득한 일군의 호족들은 이후 명문(名門)·대족(大族)으로 성장하여 발언권을 강화해가면서 후일 문벌귀족의 선구를 이루었다.

위왕조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다음해 성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전한 경제의 자손이라는 점이 유비의 명분상의 이점이었기 때문에 한으로 국호를 삼았다. 이를 전·후한과 구분하여 촉한(蜀漢)이라 부른다. 유비정권은 화북에서 이동해온 유비의 측근인물들과 사천 토착호족과의 연합정권이었는데, 풍부한 경제적을 바탕으로 귀주와 운남방면으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비와 제갈량이 사망한 후 급속히 국력이 쇠퇴해 263년 위왕조에게 멸망당했다.

한편 오에서는 조비가 즉위하자 아직 자립할 만큼의 국력이 되지 않아 일단 신하로서 복속하여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결국 위의 책봉체제에 편입된 것이다. 그러나 국정이 안정되자 손권은 222년에 황무(黃武)라는 독자의 연호를 세우고 오왕조를 세웠다. 수도를 건업(建 )으로 옮긴 오는 강동의 토착호족의 협력을 얻어 가능한 것이었는데, 당시 오의 문벌은 주씨(朱氏), 육씨(陸氏), 고씨(顧氏), 장씨(張氏) 등의 4성이었다. 이들은 사병과 독자적인 영지를 보유한 대세력으로 발전했고, 황제권은 이와 반비례해 약화되었다. 결국 280년에 위의 뒤를 이은 서진(西晉)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러나 오왕조 시기에 화북의 위왕조에 대항해 강남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후일 남조가 장기간 화북의 이민족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였다. 오왕조는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수량을 갖춘 이 지역에서 치수와 배수 및 간척과 농경지의 개간에 주력함으로써 전란을 피해 강남으로 도피해온 이주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새롭게 개착된 운하망은 배수와 물자의 수송에 도움을 주어 상업과 수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수도인 건업은 강남 경제의 중심지로서 동남아시아의 상선을 물론 로마제국의 무역선도 출입하는 국제도시로서 성장하였다, 이후 서진 말년에 건강(建康)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는데, 이후 남조시대 강남정권의 거점도 이 도시였다.


6.1.2. 조조정권의 성격

조조는 패국(沛國) 초( ) 출신으로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가 되었던 조숭(曹崇)의 아들이다. 조숭은 1억전을 내고 태위의 관직을 샀다. 조숭은 본래 하후(夏侯氏)였다고 하는데, 굳이 분류하자면 탁류에 속했다. 조조는 향리의 추천을 거쳐 관리가 되었지만 동탁의 전횡을 보고는 가산을 털어 5천명의 병사를 모은 후, 황건의 잔당을 토벌하여 자신의 군대에 충원함으로써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후 헌제를 업고, 원소와의 관도(官渡)전투에서 승리한 후 차례로 업( )을 근거지로 하여 213년에 위공(魏公)이 되었고 마침내 위왕에 올랐다.

조조를 지지하던 호족들은 부곡(部曲)이라 불리는 사병집단을 거느리고 빈객(賓客)이라 불리는 가신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정부가 일반 민호로부터 항상적으로 병력과 세역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조는 병호제(兵戶制)와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병호제란 병력의 확보를 위해 모병과 투항병을 중심으로 하여 가족을 대동한 채 일정 지역에 거주시키고 생활을 국가에서 보장해 줌과 동시에 호적을 일반 주군민과 구별하여 대대로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제도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상앙변법 이래 채택되었던 병농일치의 제도가 병농분리의 제도로 바뀐 것이다. 이 제도는 이후 오와 촉에서도 실시되었고, 남북조를 통해 실시되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병호의 신분은 저하되었다. 또 전란으로 토지가 황폐화하고 군량이 부족하였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 둔전제이다. 둔전에는 군둔(軍屯)과 민둔(民屯)이 있는데, 군둔은 한대부터 있었던 것이고 조위(曹魏)시대에도 국경지역에서 실시하고 있었다. 조조의 경우는 내지에 민둔을 설치하고 둔전의 경작자는 일반 주군민 중에서 모집하거나 피정복을 강제로 이주시켜 확보하였다. 둔전민에 대한 토지의 지급면적은 1호 당 100무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며, 호족의 토지를 소작할 때와 비슷하게 수확의 50-60% 정도를 국가에 바쳐 이를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이로써 유민의 생활안정과 안정적인 군량확보를 할 수 있어 삼국 중 가장 강대한 국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강남의 오나라에서도 둔전제와 병호제를 실시했는데, 오의 경우 관료와 무장들이 전객(佃客)과 병호(兵戶) 및 둔전(屯田)을 세습적으로 소유하였기 때문에 분권적인 통치구조를 만들어냈다.

조조정권은 일반 주군민에 대해서도 화북을 통일하기까지 전조(田租)와 호조(戶調)의 세제를 실시하였다. 전조는 소유지의 토지면적에 따라 1무당 속(粟) 4승(升)을 납부하였고, 호조는 호마다 평균 견(絹) 2필, 면(綿) 2근을 바쳤다. 이를 한대의 조세와 비교해 보면 호를 단위로 세금을 정한 것은 국가의 호구(戶口)에 대한 장악력이 저하되어 인두세에서 호 단위의 과세로 전환되었고, 전납이 현물납으로 바뀐 것은 화폐경제가 후퇴하고 현물경제가 우세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조는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후한 이래의 유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명사의 추천에 의해 관리가 되는 방식을 버리고 오로지 재능만 있으면 발탁하는 등용법을 채택하였다. 원래 탁류 출신인 조조는 명사들의 청류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반드시 도덕적인 자질과 재능이 일치한다고 보지 않았다. 후한 이래 예교주의 영향에 따라 명문과 명사가 추천되어 관리가 되는 것 보다는 현실의 급박한 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인재를 선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조가 자신의 힘에 의한 질서의 회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한왕조의 정통성에 연연해 명절을 지키는 명사보다는, 자신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추종자를 원했음을 반영한다.

조조와 그의 아들인 조비와 조식(曹植)은 모두 정치가이자 뛰어난 문학가였다. 따라서 조조의 막하에는 뛰어난 문학가가 모여 문단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해 한 헌제의 연호를 딴 건안문학(建安文學)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상과 같은 정책을 기반으로 하여 위는 삼국 중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당시 국력을 비교해 보면 위·오·촉의 주수(州數)는 9:3:1이었고, 호수(戶數)는 7:5:3, 구수(口數)는 4:2:1이었다. 오와 촉은 지역적으로는 위에 필적할 정도로 광대하였지만, 중앙권력의 호구 장악 능력이나 주군(州郡)의 편재에서 위보다 뒤졌다. 대체로 삼국의 실력은 6:2:1 정도였다고 추정되며, 여기에 한의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위가 가장 강성하였다.


6.2. 위진의 문벌사회

6.2.1. 진의 통일과 점전(占田)·과전제(課田制)

위왕조의 3대 황제인 명제(明帝)는 대장군 사마의(司馬懿)에게 정권을 맡긴 후 오로지 수도인 낙양의 건설에 전념하였다. 사마의는 요동의 군벌 공손씨(公孫氏) 정권을 멸망시키는 등 공적을 쌓아 권력을 더하였다. 사마의는 이후 조씨 일족을 제거한 후 사망하였지만, 그 위세는 아들은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에게 이어졌다. 사마소는 263년에 촉한을 멸망시키고 그 공로로 20개 군을 거느린 진왕(晉王)이 되었다. 사사소의 장자인 사마염(司馬炎)은 위왕조가 한에서 선양받은 것과 같은 방식에 따라 예정대로 황제의 지위를 양위받아 265년 진(晉)왕조를 수립했다. 사마씨의 정권장악을 지지했던 것은 당시 일류 호족이었다. 조조는 법술정치로 호족을 억압했기 때문에 호족 사이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 반면 사마씨의 정치는 '관정(寬政)'이라고 칭해졌다. 관정이란 황제권의 행사가 소극적인 것을 의미하며, 호족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진의 무제가 된 사마염은 280년에 오왕조를 멸망시켜 전국을 통일하자마자 화북을 중심으로 한 지배질서의 회복과 농업생산의 부흥에 착수하였다. 먼저 점전·과전제라는 토지제도를 실시하고 호조식(戶調式)이라는 새로운 세제를 반포하였다. 점전·과전제는 현재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해 논란의 여지가 많은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점전은 토지의 점유면적을 규정한 것으로, 관인이에는 관품에 따른 규정이 있고, 일반 농민에게는 남자 70무, 여자 30무를 점전으로 하였다. 이것은 국가가 그만큼의 토지를 급전한다는 의미보다는, 토지를 점유할 수 있는 한도를 규정한 한전적(限田的)인 성격이 강한 토지제도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서민의 계층분화를 방지하는 데도 목적이 있었다. 과전은 경작의무를 부과하고 과역을 부담시키는 토지이다. 따라서 과역의 부담이 없는 귀족에 대해서는 과전의 규정이 없다. 서민은 16-60세인 정남(丁男)일 경우 50무, 정녀는 20무, 13세에서 15세 및 61세에서 65세에 속하는 차정잠(次丁男)은 25무가 과전액이었다. 이 과전액을 기준으로 하여 전조(田租) 속(粟) 4곡, 정녀는 1곡6두, 차정남은 2곡을 납부했으며, 호조식으로는 정남호(丁男戶)일 경우 호당 견 3필과 면 3근, 여자와 차정남의 호는 그 반을 부담하였다.

결국 점전·과전제는 일반 농민 1호 당 약 100무의 전토를 확보할 수 있게 하고, 그 대신 70무 정도를 기준으로 하여 엄격히 조세를 징수하는 제도였다고 보인다. 또한 귀족이나 관료에게는 관품에 따라 전객(佃客)과 전토보유액의 한도를 정해 무분별한 토지겸병을 규제하려 한 것이었다. 이는 후한 이래 방기되었던 소농민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재시도하는 의의를 가지며, 이것이 선례가 되어 5세기에 북위에서는 균전제가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토지제도는 생산력의 회복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국가가 파악하고 있는 호수가 245만에서 377만으로 단번에 증가하였다.

한말 이래 분열의 경향은 서진의 일시적인 통일로 극복되었지만 서진이 안정되 통치와 질서를 유지했던 것은 무제 일대에 그쳤다. 그러나 통일 이후 무제는 후궁이 1만에 이를 정도로 정치에 대한 열의를 상실하였다. 더구나 한말 이래 지방호족의 발전으로 끊임없이 유민이 발생하였고, 분권적인 통치가 형성되어 주군의 지방관은 이들의 지지를 얻어 군사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무제는 위나라의 멸망 원인이 황족을 억압하여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공신에게 군과 현 단위로 봉토를 지급하면서, 총 27명에 이르는 사마씨 일족을 제왕(諸王)으로 봉해 정권을 지탱해주는 울타리로 삼았다. 이들 제왕들은 봉토만 받은 것이 아니라 2만호에서 5천호 정도의 호구를 나누어 주었으며, 일정 수의 군대도 주어, 제왕들은 각종의 장군직과 도독(都督)의 직책도 겸해 지방군부의 병력까지 통솔하게 되었다. 이것은 무제의 의도와는 달리 분권적인 경향을 가속화시켰고, 이후 8왕의 난이라는 황실 제왕 사이의 피비랜내나는 정쟁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무제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이를 기회로 외척인 양준(楊駿)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상의 부패가 다시 재개됨으로써, 그 도를 더했다. 양준과 그의 동생인 양요, 양제는 삼양(三楊)이라 칭해질 정도로 뇌물로 정치를 전횡하면서 건국 당시의 관료들을 추방하고 조정과 궁중의 요직에 자신들의 심복을 배치하였다. 이로써 귀족들은 사마씨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되었고, 무제가 죽은 후 황제가 된 혜제는 섭정을 지위에 올랐다. 이러한 통치가 좀더 이어졌더라면 서진은 양씨에게 탈취되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혜제의 즉위 직후 황태후 양씨와 황후 가씨(賈氏) 사이에 외척의 대립이 벌어졌고, 결국 여남왕(汝南王) 양(亮)과 초왕(楚王) 위(瑋)의 지원을 받은 가씨 일파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그런데 무제의 숙부인 조왕(趙王) 윤(倫)이 거벙하여 가씨 일족을 살해하고 혜제를 추방하여 황제에 오르자,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제왕은 잇달아 거병하여 골육이 서로 싸우는 전란의 장이 연출되었다. 이를 8왕의 난이라 하는데(291-306), 8왕은 여남왕 양, 초왕 위, 조왕 윤, 제왕(濟王) 경( ), 성도왕(成都王) 영(穎), 장사왕(長沙王) 예(乂), 하간왕(河間王) 옹( ), 동해왕(東海王) 월(越)이다. 8왕의 난은 7명의 제왕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혜제도 독살되어, 306년 동해왕 월이 회제(懷帝)를 세워 패권을 확립함으로써 종결되었다. 8왕의 난은 수습되었지만 이 난의 과정에서 제왕들이 다투어 북방 유목민의 무장병력을 끌어들임으로써 이후 서진이 멸망하고 화북을 오호(五胡)가 장악하게 되는 중대한 화근을 남겼다. 즉 오호십육국 시대의 막을 열었던 것이다.


6.2.2. 호족(豪族)사회의 성립과 귀족제

위진시대는 지방의 명망가인 일류 호족이 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이후 남북조와 수당으로 이어지는 귀족제가 형성된 시기이다. 이들은 한대의 사대부 계통을 이은 지식인층으로서, 무장력과 재력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향리에서의 덕망을 배경으로 하여, 향리의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당시 이들 호족들은 망족(望族)이나 군망(郡望)으로 불리었는데, 망이란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호족과 일반민은 이 '망'을 통해 상호 유대를 맺은 데서 비롯된 용어이다. 군망이란 후한 이래 주가 최대의 지방행정 구획이 되면서, 군은 중앙정부의 수족과 같은 행정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지역사회가 성립 단위가 되었고, 그 출신 명족을 중심으로 한 자립적 세계가 형성된 데서 비롯되었다. 귀족이란 바로 이들 망족, 군망을 이르는 말이다.

위진정권은 정권 내부에 이들을 흡수해가는 과정이었다. 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은 조조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조조는 중앙집권적인 지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그가 시행한 여러 제도나 인재발탁에서도 그 점은 확실했다. 조조의 아들인 조비는 위를 건립하자 귀족계층과 국가권력의 결합을 도모하였다. 220년에 진군(陳 )의 건의에 따라 시행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이 그 실례인데,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품관인법은 군국에 각기 중정관(中正官)을 두고 그 지방의 인재를 가문, 덕행 및 재능과 향론에 따라 9등급으로 등급을 매겼다. 이를 향품(鄕品)이라고 한다. 이를 중앙정부에 보고하면 중앙에서는 향품의 고하에 따라 초임관을 향품보다 4등급 아래의 관품(官品)을 주었다. 원래 진군이 건의했던 목적은 각 지방에서 전란이 계속되어 향리사회에 기반한 한대 향거리선(鄕擧里選)을 통해서는 유능한 인재의 등용이 어렵게 되었으므로, 각 군의 출신자를 군중정에 임명해 정확한 인사를 이루려고 한 데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왕조에서 물려받은 인물을 심사하여 한왕조를 추종하던 관료를 배제하는 데 있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원래 구품관인법 자체는 결코 귀족제를 옹호하고 지탱해주기 위한 제도는 아니었다. 한대 향거리선에 의한 임용제도가 관청의 장관이 인물을 추천하였기 때문에 추천자와 피추천자 사이에 개인적인 유대가 형성되고, 이것이 중앙권력의 침투를 방해했기 때문에, 이를 배제하고자 중정관이라는 전임관(專任官)을 두고, 직접 정부에 이들의 세력을 흡수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지역사회는 이미 귀족들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고, 군중정 자신도 귀족이었기 때문에 결국 인물심사의 기준은 가격의 고하에 둘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대대로 향품을 높게 받아 추천되는 이른바 문벌귀족이 탄생하게 되었다. 구품관인법은 본래의 목적과는 관련없이 가문의 고하를 판별하고 귀족의 관직의 서열을 정하는 수단으로 운영되어, 신분질서가 이 향품의 고하 즉 가격의 고하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더욱 조장한 것은 사마의에 의해 실시된 주대중정(州大中正)의 설치였다. 주대중정이 등장하면서 군중정은 독자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중앙고관직을 독점한 귀족들의 의향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게 되었다. 고관을 배출한 가문은 계속 고관을 배출하게 되고, 가격은 고정화하였으며, 지방의 귀족사회와 중앙정계의 결합은 더욱 강화되어 국가는 귀족국가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결과 서진시대에는 "상품(上品)에는 한문(寒門)이 없고 하품(下品)에는 세족(世族)이 없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상품 가운데 향품 1품으로 선발되는 것은 특수한 예외였기 때문에 귀족은 보통 2품으로 선발되어, 문지이품(門地二品)이라 불리는 존재가 바로 문벌귀족이었다. 상품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한문(寒門)·한인(寒人)이라 불렸고, 그 아래에 품관이 없는 서민이 있어 사서(士庶)의 구분은 매우 엄격하였다. 결국 구품관인법은 귀족 세력의 관료화를 이루는 수단이었음과 동시에 당시까지 관리의 봉록액을 기준으로 관위의 등급을 매겼던 제도에서 9품이라는 추상적인 위계에 따라 규정되었으며,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이러한 관품체계를 답습하였다.

귀족제은 지방 호족의 세력이 발전하여 성립된 것이었기 때문에 지방의 향당사회외 밀접한 관련이 맺고 있었다. 위진의 관료가 된 일류 귀족의 아래에는 지방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다수의 지방 군소호족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전란으로 생계를 잃은 소농민을 자신의 비호하에 두고 국가의 직접 지배에서 배제하여, 자신들의 대토지를 경작하는 전객(佃客)으로 사역시키고, 세역을 회피하였다. 국가는 이러한 정세에 대해 과역 면제에 대해 일정한 한도를 정해 호족의 지배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위진시대에는 관품에 따라 각기 일정수의 전객과 의식객 및 토지점유액을 규정한 것이 급객제(給客制)이다. 그 액수는 진대의 것이 알려져 있는데 표와 같다. 객의 종류 중 의식객은 주가(主家)에서 의식을 지급받으면서 가내노동과 직영지의 경작을 담당하는 객이며, 전객은 주가의 토지를 소작하여 수확을 주가와 반분하는 객이며, 동진에서 보이는 전계는 주가의 가정(家政)을 담당하는 객이었다.

구품관인법이 귀족의 관료임용상의 특권의 인정해주는 제도적인 장치였다면 급객제는 귀족의 객에 대한 지배를 인정하고, 그 경제적 지위도 관품에 따라 인정해 주는 제도였다. 이리하여 귀족제는 그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정립해 문자 그대로 귀족제·귀족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6.3. 오호의 대두와 동진의 성립

6.3.1. 호족(胡族)의 화북진출과 호족국가의 흥망

8왕의 난에서 나타나듯 사마씨 일족의 골육상쟁을 벌였고, 귀족사회를 형성한 사인들은 특권층으로 성장해 사리를 추구하는 탁류속으로 휩쓸렸다. 서진시대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증(何曾)은 매일 식사비용으로 1만전을 사용했다고 하며, 그 아들인 하소(何 )는 하루 식비를 2만전으로 정했다고 한다. 또 석숭(石崇)은 낙양 교외에 대저택을 지어놓고 담장 40리를 비단으로 두르고, 장작 대신 밀납을 사용했다. 이러한 일화는 서진의 통치집단을 역사상 가장 부패한 정치의 전형으로 거론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8왕의 난으로 전란이 전 영토로 확대되자, 화북의 농경지대에 수해와 한대 및 메뚜기떼의 피해가 잇달아 발생하였고, 치수시설도 방치되어 농경지는 황무지가 되었다. 바로 후한의 멸망 직전 상황의 재판이었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화북의 농민들은 사방으로 유랑하게 되었는데, 주로 강남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유민(流民)은 30만 호에 1백만 명 이상이었다고 추산된다. 현재 산서성 부근 주민의 3/5이 남으로 이주하여, 양자강 유역 특히 호북과 사천 일대는 이러한 유민으로 들끓었다. 이에 따라 서진 말기에는 도처에서 유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귀족의 사치, 제후왕의 분권적인 정쟁, 백성의 빈궁화 등은 서진의 몰락을 예고하는 징조였다.

화북 농경민의 빈궁화와 남으로의 이주는 곧 화북에 이주했던 이민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후한 이후 흉노는 한제국에 굴복해 유목민으로서의 생활과 부락체제를 상실하고 화북의 농경지대로 분산·이주하였던 바 있다. 이들의 옛 땅에는 흉노의 지배를 받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족이 차례로 동북지역에서 이주해왔다. 오환은 애처에 한왕조를 위해 북변의 방비를 담당했지만 후한말부터 군웅들에게 장악되어 중국 내전에서 활약하였다. 선비족은 오환의 북방에 있다가 2세기 경에 단석괴(檀石槐)에 의해 통일되었지만, 이후 모용부(慕容部), 우문부(宇文部), 탁발부(拓拔部), 단부(段部)로 분열되어 중국의 내지로 들어왔다. 서진의 북서쪽과 서방에 있던 티베트계통인 강(羌)족과 저( )족은 오히려 한족의 유입에 의해 기반을 상실한 채 강제로 내지로 분산·이주하였다. 내지로 들어오거나 분산·거주하던 이민족의 운명은 한족 이상으로 비참하여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豪族)들에 의해 전객이나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흉노의 별부(別部)인 갈( )족 추장 출신으로 행상, 전객, 노예로까지 전락했던 후조(後趙)의 건국자 석륵(石勒)은 바로 그러한 실례였다. 그러나 일부는 여전히 부락제의 전통을 지키며 추장이나 대인(大人)의 통솔하에 병력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8왕의 난은 그들에게 용병이라는 활동무대를 제공하였지마, 그들의 신분이나 대우는 비참한 것이었다. 이미 강통(江統)같은 사인은 [사융론(徙戎論)]을 써, 이민족의 이주와 잡거가 가져올 위험성을 인식하고, 내지거주 이민족을 본래의 주거지인 변경 밖으로 이주시킬 것을 제안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민에 의한 반란이 빈발하던 304년 유연(劉淵)이라는 부장이 좌국성(左國城, 산서성)에서 자립하여 한(漢)을 세웠다. 유연은 남흉노 선우의 자손으로 자신이 유씨 성임을 강조하여 한이라 칭했고, 8왕의 난 때는 성도왕 영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던 용병 대장이었다. 이를 계기로 오호십육국시대가 개막되었으며, 유연은 308년 평양(平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황제를 칭했다. 한편 동해왕 월에 의해 옹립된 회제는 영원히 좋은 시대라는 영가(永嘉)를 연호로 바꾸고 국정의 쇄신을 꾀했지만, 오히려 동란이 본격화하여 전란으로 빠져들어갔다. 유연은 석륵을 파견해 하남·산동과 화북을 점령하였고, 310년 유연이 죽은 후 아들인 유총(劉聰)이 뒤를 이어 유요(劉曜)를 파견해 서진의 수도 낙양을 공략하였다. 낙양은 311년 결국 함락되어 약탈과 살육의 장으로 변했으며, 회제는 체포되어 평양으로 호송되었다가 후일 살해되었고, 황후 양씨(羊氏)는 유총의 처가 되었다. 이를 영가의 난이라 한다. 생존한 대관과 장병이 장안에서 민제(愍帝)를 세웠지만 316년 유요의 군대에게 함락되고,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포로가 된 회제·민제 두 황제는 생전에 연회석상에서 술을 따르는 노예역할을 하였다.

서진이 멸망한 후 화북에서는 한족을 포함해 여섯 민족이 130년간 전후 18개국, 22개의 정권을 건립하는 오호십육국의 동란시대를 맞이하였다. 오호란 흉노, 선비, 저, 갈, 강족을 말한며, 십육국이란 최홍(崔鴻)이 지은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라는 저서에서 시대의 이름을 딴 것이다. 따라서 정확히 16개국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한족의 관점에서 오호십육국시대를 야만적인 폭군이 속출한 무질서한 난세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정통왕조를 지향한 군주도 있었으며, 한족과의 융화를 꾀하여 농경지의 개간과 부흥에 진력한 군주도 있었다. 또 불교가 이 시대에 뿌리를 내렸다. 후한 예교주의의 영향으로 형해화한 유교 대신에 등장한 불교는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며 수당시대까지 이어졌다. 또한 이 시대를 호족과 한족의 대립으로만 보는 것도 옳지 않다. 오호시대를 거치면서 호족과 한족은 스스로의 장단점과 한계를 인식해 이후 북조에서 호한의 융합체제를 성립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로써 중국의 문화에도 활력을 불어넣은 역동적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서진을 멸망시킨 한(漢)도 318년 유총이 병사하자 내분이 일어나 유요가 장안에서 전조(前趙)를 세워 자립했고, 석륵도 화북을 근거지로 하여 후조(後趙)를 세웠다. 두 사람의 항쟁은 329년 석륵의 승리로 끝나고 화북의 대부분을 수중에 넣었다. 석륵은 호족국가를 건립했지만 구품관인법을 채용하고, 태학을 설치하였으며, 호조식과 유사한 세제를 채택하는 등 중국식 지배체제를 재건하면서 황폐한 토지의 재건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석호(石虎)의 잔혹하고 야만적인 통치로 인해 한족 출신의 양자 염민( 閔)에 의해 멸망하고, 염민도 위(魏)를 세웠지만 석호와 반대로 호족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로 인해 3년만에 붕괴하였다. 뒤이어 등장한 것은 선비계 부족과 저족 및 갈족이었다. 선비족 모용부는 337년이 이미 전연(前燕)을 건립하였고, 358년 염민이 세운 위를 멸망시켜, 화북지역은 비교적 안정된 생산기반을 회복하였다. 화북의 서방에서는 저족이 건립한 전진(前秦)이 수립되어 전연에 대항하였다. 전진은 부견( 堅) 때에 한족 출신 재상인 왕맹(王猛)의 도움으로 차례로 오호제국을 멸망시켜 376년 드디어 화북 전역의 통일을 달성하였고 오호시대 중 가장 안정된 치세를 실현하였다.

전진이 화북 통일은 강남에서 성립된 동진과의 충돌을 불러 일으켰다. 명실상부한 중국의 황제를 꿈꾸었던 부견은 왕맹의 반대를 무릅쓰고 383년 87만의 대군을 동원해 동진 정벌에 나섰지만, 비수( 水)의 전투에서 동진의 사현(謝玄) 등이 지휘하는 8만의 북부군(北府軍)에게 대패를 당했다. 비수의 전투 이후 전진은 공중분해되었고, 각지의 정권이 자립해 다시 분열·할거의 시대가 되었으며, 더 이상의 남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후에는 회수를 경계로 남과 북의 정권이 병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6.3.2. 호족국가의 성격과 호족 지배하의 한족사회

오호시대의 혼란기에도 통일을 향한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오호제국의 흥망을 살펴보면 대개 단명으로 끝나고, 더욱이 멸망 때에는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것은 오호제국의 국가구조에 그 원인이 있었다.

우선 오호제국은 지배민족이 부족제를 유지하면서 다수의 한족을 지배해야 했다. 여기서 중국 전통의 집권적인 지배조직과 그들의 부족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가 항상 문제가 된다. 흉노가 건립했던 한(漢)에서는 황제가 한족을 직접 장악하고, 황태자에게 대선우(大單于)의 직책을 주어 유목계 이민족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선우는 예전에 유목국가의 최고군주였지만 이 시대에는 선우 위에 한족을 지배하는 중국식 황제가 군림하였다. 이같은 국가구조는 중국의 천자=황제가 중화민족과 이적(夷狄)을 포함한 천하를 지배한다는 중국적 이념에 따른 것이지만, 중국의 황제만큼 집권적인 기반이나 통치조직을 갖지 못했다. 지방의 주군에 대한 지배는 불철저하였고, 국가권력을 중핵을 이룬 것은 호족의 군대 즉 무력이었다. 이들 군대는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종실에게 분배되어 각지에 주둔한 제왕(諸王)들에 의해 통솔되었는데, 군대는 부락제의 전통을 충실히 유지하고 있었으며, 주군현의 관리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일반 민호도 예혹시키고 있어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결국 호족국가는 일종의 군사적 봉건제와 흡사하였다.

이는 국가체제의 취약함을 종실간의 혈연에 의해 보강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건국시에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일단 지배권이 확립된 뒤에는 권력을 둘러싼 내분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하였다. 특히 중원의 지배는 이들에게 이익을 보장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에 일족간의 결속이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호족 왕조는 대개 단명으로 끝났다. 여기에 한족처럼 장자 중심의 왕위계승제도의 전통이 미비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어서, 황제의 사후에는 계승분쟁이 뒤를 이었다. 결국 호족국가가 한족까지를 포함한 중국의 왕조로서 군림하기 위해서는 종족과 혈연이 아닌 보편적인 통치원리에 입각한 국가가 요구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석호나 염민의 예에서 보듯 무력을 지닌 소수 호족과 다수인 한족간의 갈등을 유발시켜 비참한 학살극이 재연될 소지는 언제나 존재했다.

한편 오호제국에서는 정복지에 대한 대책으로서, 한족 호족과 유목 추장의 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수도 주변에 지배의 중점을 두고 노동력과 병력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취했다. 오호의 군주들은 수십만에 달하는 대량의 사민을 통해 군주권을 강화시키고 지방세력을 억제해 나아갔으며, 전연의 경우 사민의 대상자에게 토지와 경우(耕牛)를 지급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이후 북위의 정복지 정책으로 이어져, 적극적인 사민과 계구수전(計口授田)에 의한 황제권의 강화와 집권적 국가체제의 재건에 공헌하게 되었다.

반면 서진의 멸망 이후 유민들의 폭동과 오호의 전란으로 인한 정치적 혼미 속에서, 전란을 피하기 위한 인구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강남 등 타지로 이주한 사람이나 화북에 남아 있던 사람 모두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각지에서 자위단을 조직하여 향촌의 질서를 유지했다. 지방의 호족들이 이들의 지도자로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집락(集落)이 등장했다.

자위조직이 등장한 것은 이미 후한말부터지만 위진시대를 거치고 특히 서진말의 동란 과정에서 급증하였다. 자위조직은 종족과 빈객을 중심으로 하여 지도자를 추대하고, 농경지를 개간하여 자립적 경제기반을 갖추었다. 이들의 지도자인 주(主)는 종족과 빈객이 지켜야 할 법률을 만들고, 학교를 세우고, 혼인의 예를 정하는 등 실로 작은 하나의 국가 구실을 하였다. 이들 자위단이 형성되는 장소는 기존의 향리와는 다른 산간의 요지였고, 방벽(防壁)을 쌓아 외부의 침략에 대항하였다. 당시 이러한 방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오(塢)·보(保)·벽(壁)이라 불렀다. 오 등을 중심으로 집락이 형성되면 이것을 촌(村)이라 불렀다. 한대의 향리가 도시국가적인 성격이 강하게 남은 데 반해, 이 시대에 등장한 촌은 그야말로 전원에 세워진 농촌을 의미하였다. 오주는 서양의 봉건영주와 비슷하지만, 촌민들의 추대에 의해 옹립되었던 점과, 공동체적 원리에 입각해 오와 촌이 운영되었던 점에 차이가 있다. 오의 내부는 이전 시대까지의 혈연주의가 아닌 지도자와 성원간의 인격적인 연대가 통합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었다.

오의 구조나 규모 등에 대해서는 일정치 않은데, 대개의 경우 무기와 식량을 자급하며 외부의 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다. 호족국가는 화북의 각지에서 이러한 오주의 무장세력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일부는 함락시켰지만 대부분은 오주에게 지방관과 장군직을 주어 지방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토록 하였다. 결국 호족국가는 귀족사회의 분권적·자치적 경향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여기서도 오호제국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오는 점차 일종의 별천지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민가에서 떨어진 산간에 외부와의 교섭을 끊은 채 살아가는 집단생활을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이상향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도연명(陶淵明)의 [桃花源記]는 당시 이러한 오의 세계를 모델로 한 것이라 한다.


6.3.3. 동진정권의 성립과 한계

서진의 멸망 소식을 건강(建康)에서 들은 서진 왕실의 후예 사마예(司馬睿)는 사실상의 왕조 부흥을 꾀해 316년에 진왕(晉王)이 되고, 317년 민제의 죽음이 전해지자 원제(元帝)가 되어 동진왕조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원제에게 큰 도움은 준 것은 낭야(琅邪)의 명족인 왕도(王導)였다. 그는 지지기반이 거의 없고 재능과 명망에서 떨어지는 것을 여겨졌던 원제를 위해, 영가의 난으로 화북에서 이주한 귀족들과 원래 강남의 토착귀족들을 결합시켜, 이후 3대에 걸쳐 새로운 정권의 기반을 창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낭야 왕씨를 동진 제일의 귀족으로 발전시켰다. 서예가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는 왕도의 사촌 동생이다.

원래 강남지방에는 삼국의 오나라 때부터 토착귀족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오나라 멸망 후 서진에 귀부하였는데, 동진정권은 이들을 이용하여 국가를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강남의 토착호족들은 북래귀족(北來貴族)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북래귀족은 자신들의 문화적 우월성에 기초해 토착귀족과 결합하였기 때문에 토착귀족은 이류귀족으로 대접받았다. 당시 화북 출신의 귀족을 교성(僑姓)이라 불렀는데, 왕씨와 사씨(謝氏)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강남의 토착귀족은 오성(吳姓)이라 불렸는데, 주씨·장씨·고씨·육씨가 가장 유명하였다. 화북의 귀족들도 강남으로 이주한 시기가 늦은 귀족들은 창( )이라 불리며 신분상 차별을 받았다. 이리하여 서진의 문벌귀족제가 동진에서도 재개되었다. 대체로 동진정권은 화북출신의 귀족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특히 왕씨와 사씨 및 유씨(庾氏)·환씨(桓氏)가 권력의 중추를 구성했다. 강남의 오성은 이들보다 낮은 관직을 주로 담당하였지만, 화북의 오호제국으로부터 강남을 보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하여 연합했던 것이다. 귀족들은 문벌에 따라 고관과 청직(淸職)을 독점하였고, 휘하의 백성에게 과역을 감면시켜 주는 등의 특권을 누렸다.

동진의 이주정권적인 성격은 교주군현(僑州郡縣)의 설립과 호적제도에서 잘 드러난다. 교주군현이란 전란을 피해 이주해 강남에 정착한 향리에 교주와 교군, 교현을 세워, 이주 이전의 주군현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동진의 주군현에 편입시키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들에게는 언젠가 화북의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바램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들 이주민은 황적(黃籍)에 등재되어 토착민의 호적인 백적(白籍)과 구별되었으며, 본적지의 주군을 명기하여 조세를 면제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이후 불만을 초래해 이주민도 전부 현지의 토착민과 함께 호적에 등록시키려는 토단(土斷)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동진시대를 통해 귀족들의 정권투쟁은 거의 일관되게 지속되었다. 322년 건국공신인 왕돈(王敦)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건강을 일시 점거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들에 의한 연이은 반란이 동진왕조의 멸망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북방에 할거하던 정권으로부터의 위협이 강했던 데다, 화북을 탈환하여 낙양에 다시 수도를 세울 때까지는 귀족들의 연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였다. 당시 동진의 중심적인 군대는 화북에서 이주한 유민집단이었다. 범양의 귀족 조적(祖 )이나 치감( 鑒), 소준(蘇峻) 등은 유민의 지휘자로서 무력을 지닌 채 각지에서 무장하고 있었다. 조적은 적극적으로 북벌을 전개해 석륵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또한 소준도 왕돈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지만 이후 327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치감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동진의 중요한 군사력을 형성했던 것은 치감이 거느린 유민집단이었다. 그들은 건강의 동쪽 경구(京口)에 주둔하여 정착하였다. 동진정권은 이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제공하고 직업군인인 병호로 삼았다. 치감이 죽은 후 건강정권은 중요한 인물을 장관에 임명하여 건강 방위의 임무를 담당했는데, 이 군단을 북부군(北府軍)이라 불렀다. 북부가 수도 건강을 방위하기 위한 군대였다면 양자강 중류의 형주(荊州)에 배치한 군단을 서부군(西府軍)이라 한다. 형주는 사천과도 통하고 화북과도 이어지는 요충지였다. 일찌기 왕돈이 이 지역의 유민들을 진압하고 토착귀족들과 협력하여 세력을 확대시켰다. 서부군은 왕돈의 난 후 환온(桓溫)이 사천을 장악한 후 전후 3차례에 걸쳐 북벌을 감행했다. 356년 2차 북벌에서는 일시 낙양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계속 북벌을 주장하는 환온에 맞선 동진정권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환군하였다.

환온은 북벌과정에서 전과를 올렸지만 이를 기반으로 동진을 대신하려는 정치적 야심도 드러냈다. 반면 동진의 문벌귀족들인 이미 화북으로의 귀환을 거의 포기하였기 때문에 경솔한 군사적 모험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환온은 동진정권을 탈취하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373년).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은 마침내 다시 양자강을 건너 건강을 함락시키고 정권을 탈취하여 초(楚)를 세웠다(403). 그러나 서부군단의 환현이 북부군단의 장군들을 살해하고 군단의 분할을 꾀하자, 북부군단은 유유(劉裕)를 중심으로 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이로써 남조를 통해 나타나는 '형양(荊揚)간의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형주와 양주는 군사적인 2대 요충지로서 동지의 호구 중 약 반을 점하고 있었다. 동진을 비롯한 이후 남조의 강남정권은 형식상 중앙집권적 관료기구를 구비하고 있었지만, 지방의 자사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의 통제를 이탈할 위험성은 상존하였다.


6.4. 강남의 정권

6.4.1. 남조 정권교체와 그 성격

동진이 멸망한 후 강남지역에서는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왕조가 잇달아 들어섰는데, 모두 건강을 수도로 하고 북위 및 이후의 화북왕조와 대립하여다. 이를 남북조시대라고 하는데, 남조의 역사는 420년 송의 건국부터 589년 진의 멸망까지 170여년간 이어졌다. 남조의 4정권은 모두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어졌는데, 이는 새로운 실력자에게 황제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동진에서는 399년에 손은(孫恩)·노순(盧循)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귀족들의 사치와 정권의 부패 및 과중한 세역 부담에 저항해 일어난 농민반란이었다. 대대로 오두미도를 신봉하던 손은은 401년 건강을 위협하였지만, 이후 북부의 정예병에 패했고, 그 뒤를 매부인 노순이 이어 건강을 협공하였지만 결국 411년 평정되었다. 이 반란을 평정한 유유는 남연(南燕)과 후진(後秦)을 멸망시키고 낙양과 장안 두 도시를 탈환하였다. 이것은 동진 1백년 역사상 가장 큰 공적이었으며 이주민들의 염원을 잠시나마 풀어준 쾌거였다. 환현의 반란까지 평정하고 마침내 동진의 공제에게 선양을 받았다(420).

유유는 사씨나 왕씨 등의 문벌귀족이 아니라 한문(寒門) 출신의 무장이었다. 화북 이주민의 자식이었다. 송의 무제가 된 유유는 사혼과 왕유 등 명문귀족을 축출하고 한문 출신 군인과 관료들을 대거 발탁하였다. 또한 북래 이주민과 강남 토착인을 구별해 호적에 등재하던 구분을 철폐하여 남인과 북인 모두에게 공평한 세역을 부담시켰으며, 귀족이나 호족의 비호 아래 국가의 세역을 피하고 있던 호구를 호적에 편입시켜 세원으로 삼았다. 이와 아울러 귀족이 소유하고 있던 산림수택(山林藪澤)에 대한 점유를 제한하였으며, 강남지역에 적합한 논농사의 개발에 전력하여 농경지를 확대하고 논농사에 적합하지 않을 토지에는 맥작(麥作)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종래 낙후되었던 강남의 농경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고, 대토지소유를 가능한 한 억제하여, 소농민을 중심으로 한 농민생활의 안정과 지배체제를 확립시켰다.

이어 문제의 치세 30년간(424-453)은 원가(元嘉)의 치세라로 일컬어지듯 남조를 통해 가장 국력이 강성했고 영토도 최대로 확대된 시기였다. 문제는 무제가 추진했던 소농민 위주의 경제정책과 호적의 정리작업을 계승하여 농경지의 개간을 장려했고, 과호(課戶)를 증가시켜 국가의 병력원과 재원을 확보하였다. 문벌귀족의 특권적 사회적 지위도 인정하여 귀족문화가 다시 활짝 꽃피웠다. 그러나 북위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수도인 건강이 위협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북위는 회수 유역에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다음 효무제는 무단통치를 감행하여, 지방관의 임기를 단축하고, 가문이 낮은 한문 출신을 각주의 군정에 파견해 감독토록 하였는데, 이들을 전첨(典籤)이라 한다.

한문 출신의 황제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군사력뿐이었다. 군사력은 각지의 군단장으로 임명된 일족에게 나누어져 있었다. 따라서 일족 중의 실력자들 간에 내전은 피할 수 없었다. 효무제 이후 10년 동안 6명의 황제가 바뀌었고 8명의 황제 중 암살을 면한 것은 3인 뿐이었다. 이로써 민생의 안정이라는 국가의 기본 임무는 소흘하게 되었고, 마침내 송조를 배반한 무장 출신 소도성(蕭道成)이 실권을 장악해 제를 건립하였다(479).

소도성 역시 유유처럼 한문 출신의 무인이었다. 송조 말기의 내전에서 군공을 세워 제를 건립한 후, 재위 동안에 절약정책과 호적정비를 추진하였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뒤를 이은 무제는 원가의 치세를 본받아 영명(永明)의 치세(482-493)라 할 정도로 약 10년간 철저한 호적조사와 한문 출신의 기용으로 영역 내는 평안하고 경제적으로는 번영하였다. 그러나 어린 황제가 2대에 연이어 등장함으로써 일족간의 송말의 골육상쟁 상황이 재연되어, 8년간 5명의 황제가 바뀌었다. 특히 명제는 경쟁상대였던 고제와 무제의 아들과 손자 27명을 살해하는 등 5년간 황족 40여명을 죽였다. 또한 제왕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전첨과 주사(主師) 등의 말단관리가 황제의 수족으로서 자사의 권력을 능가해 문벌귀족의 반감을 샀다. 더구나 북위는 이 틈을 타 남하하여 한수 이북과 회수 이남의 땅을 탈취하였다. 결국 종실 출신인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연(蕭衍)이 이 502년 선양을 받아 양을 건국하였다.

남조는 일반적으로 문벌귀족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귀족제의 완성은 그 이면에 여러 내부모순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조 귀족제는 완성된 단계이자 변질의 단계이기도 하였다. 동진에서 송으로의 정권교체는 단순한 왕조 교체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문 출신이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 귀족사회였던 진과는 구별된다. 이후 남조의 황제들이 무장 출신인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원래 동진에서는 귀족이 군단을 통솔하고 있었다. 귀족은 교양있는 문관 지식인임과 동시에 실질적인 장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진 말기에 군단은 귀족의 손을 떠나 직업군인에 의해 통솔되었고, 이것이 송조의 건설로 이어졌다. 이것은 명확히 군대가 귀족들의 손을 벗어나 자립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후 제·양·진의 건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지지한 것은 군대와 현지의 토착호족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영가의 난 이후 늦게 이주했기 때문에 건강의 상류귀족사회에서는 한문으로 여져졌고, 따라서 실력으로 출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문층은 광범하게 존재하였고, 군사력을 통해 정권에 도전하였다. 남조의 귀족은 이제 군사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다만 왕조교체시의 왕조 정당화의 수단으로 그들의 권위가 유지되기 때문에 귀족들은 더욱 관료화하였다.

반면 남조의 국가권력도 무력을 통해 정권을 수립하지만 귀족의 권위를 빌어 정당성을 합리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건국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귀족과 새로운 왕조의 틈은 거의 없어진다. 결국 무력국가에서 문화국가로 변모하게 되고, 문벌주의의 폐쇄성으로 인해 왕조의 약체화와 사회적 침체를 가져온다. 이러한 왕조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은행(恩幸)이라는 존재이다. 은행은 대부분 비천한 신분으로서 황제의 측근이 되어 권세를 떨치게 되는데, 황제도 귀족관료에게 느낀 반감에서 이들을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은행과 황제권의 결합은 권력의 남용을 가져오고, 결국 왕조 말기 폭군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위가 벌어지는 것이다. 결국 귀족제가 은행의 폐를 가져온 원인이라면 귀족제 역시 재편되도 변모할 필요가 있었다.


6.4.2. 양조의 귀족제 재편과 강남의 귀족문화

무인 출신이 많았던 한문 중에서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귀족의 문화적 교양을 지닌 인물이 나타났다. 제 무제의 황자였던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이 그 대표자로서 건강의 서쪽 교외에 자리잡은 그의 저택은 남조에서 가장 유명한 교양인의 문화공간이었다. 여기에 모인 교양인 중 남조 제일의 시문 대가였던 심약(沈約))과 후에 양의 무제가 된 소연이 있었다. 심약은 강남의 무인 토호 출신이었고, 소연의 제 왕실의 먼 일족이었다.

관대한 인품으로 중망을 모은 소연은 양조를 건국하고 39세부터 86세까지 48년간이나 통치하였다. 소연의 혁명은 한문과 무인의 지지로 이루어졌지만, 심약·범운(范雲) 등은 한문 출신이면서도 당대 일류의 교양인이었다. 소연이 즉위하자 이들이 귀족을 귀족으로 편입토록 하는 관제의 개혁을 단행하였고, 또 학교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문벌에 의해 경시되었던 한왕조 이래의 수재·효렴의 제도를 부활시켰다. 이는 문벌보다는 재능있는 자를 등용하려는 현재주의(賢才主義)적인 입장에 선 정책이다. 한편 지방에서도 주군현의 수를 대대적으로 늘려 관리의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귀족의 관계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고, 귀족과 한문간의 초임관 취임 연령의 차이를 없애는 등 능력 위주의 인사정책을 폈다. 이것은 한문이 대두하는 시대적 추세를 인정한 것이고 귀족제에도 새로운 피를 주입함으로써 귀족제 몰락을 방지하려는 방책이기도 하였다.

양 무제의 치세 동안 새로운 귀족제 하에서 학문과 예술이 장려되었기 때문에 송·제시대와 같은 살벌한 분위기는 없었다. 무제 자신이 뛰어난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황태자인 소통(蕭統)은 고금의 시문을 모은 『문선(文選)』을 편집할 정도로 문단의 중심 인물이었다. 양의 귀족문화는 문예를 중시하고 미의식을 존중하는 경향을 보이면서도 기교주의의 경향이 강한 퇴폐적인 분위기가 농후하였다. 이미 남조에 들어서면서부터 귀족들은 무인이 지배하던 현실정치에 연연해 하지 않는 초속적인 경향이 강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귀의하였다. 명교를 초월한 청담(淸談)으로 유명한 위진대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이 그러하였고, 남조에서는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과 산수시인 사령운(謝靈雲)이 그러하였다. 이들 예술의 바탕은 노장사상이며, 자연으로의 귀일을 강조하는 은일적(隱逸的) 사상이었다. 예술은 귀족의 자립성을 보증해주는 수단이었고, 따라서 시문과 음악, 서예, 경학 등에서 뛰어난 예술적 업적이 나왔다. 예술과 종교와 학문은 귀족들에게 교양이자 현실로부터의 도피였지만, 남조말에는 반대로 기교적이고 유희적인 편향을 낳았다.

양의 무제는 또한 불교를 과도하게 장려하여 수많은 사원을 축조하는 재정을 탕진하였다. 무제 초 건강 주변에는 500여개의 사원이 있었지만 무제시대에만 200여개 증가되었다고 한다. 사원은 또다른 장원귀족을 형성하였다. 지배층의 사치와 무기력은 국가의 백성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문벌귀족에서 교양귀족으로 변모한 남조 귀족문화의 취약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은 바로 후경(侯景)의 난이었다. 후경은 동위의 훈귀(勳貴)였는데,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하남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위(東魏)의 권신이던 고환이 죽고 훈귀가 억압을 받게 되고 특히 대군을 거느리고 있던 자신이 중앙으로부터 경계를 당하자 서위로 도망갔다가 다시 남조 양에 귀부하였다. 관대한 양 무제는 후경을 받아들여 동위를 견제하려 하였지만, 이에 대해 동위는 군사를 동원해 양과 후경의 군대를 격파하고 양에 대해 화평을 제의하였다. 미묘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은 후경이었다. 화평의 대가로 신병이 동위에 송환될 지도 몰랐기 때문에 기선을 잡아 양자강을 건너 양의 수도 건강을 포위했다. 548년 양 무제의 치제 말년의 일이었다. 무제 초 건강의 호구수는 27만호였다고 하는데 엄청난 약탈을 당한 후 4개월 반의 저항 끝에 함락되었다.

건강이 전화를 당하자, 전란을 피해 도피한 사람들은 남조 제2의 도시인 강릉(江陵, 호북성 형주)으로 모였는데, 그 중 무제의 황자였던 소역(蕭繹, 元帝)도 있었다. 그는 왕승변(王僧辯)을 파견하여 광동 방면으로부터 북상한 진패선(陳覇先)과 협력하여 후경을 토벌토록 하고(552년), 강릉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 일단 양조를 다시 일으켰다.

그렇지만 554년 강남의 혼란을 노리던 서위의 대군이 강릉을 공격하였다. 소역은 살해되었고, 양의 사서(士庶) 10만 이상이 서위의 영토로 끌려갔다. 이후 강릉에서는 서위의 괴뢰정권인 후량(後梁)이 세워졌고, 한편 건강에서는 진패선이 왕승변을 살해한 후 진조를 건립하였다(557년). 진패선의 뒤를 이은 문제와 선제는 북제의 남하를 막아내고 민심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영토는 양자강 중·하 유역의 남쪽으로 한정되어 북제를 정복해 화북을 통일한 북주와 그 뒤를 이은 수왕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진조의 유력관료는 대개 한문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양말의 건강과 강릉의 함락에 의해 남조 교양귀족제는 소멸되었다.


6.5. 북조의 황제권력과 호한체제

6.5.1. 북위의 건국과 화북통일

선비족은 현 흑룡강성 눈강(嫩江) 유역 일대에서 유목과 수렵 및 원시적인 농업을 영위하던 부족이었고, 탁발부(拓拔部)는 선비부족 중 하나였다. 후한말의 혼란과 북변지역민의 남으로의 이주를 따라 화북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이미 농경민과의 교역이나 약탈에 의해 물자를 공급받았기 때문에 자연 남으로 진출한 것이다. 3세기 중엽에 탁발부는 세습화된 대인(大人)이라는 부족장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성락(盛樂)에 도읍을 두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서진은 이들을 회유하고자 탁발의로(拓拔 盧)를 대왕(代王)에 임명하여 산서 북부의 안정을 꾀하였다. 동진시대에 탁발부는 자립화를 추진하여 결국 338년 십익건(什翼 ) 때에 대국(代國)을 건립하였다.

376년 대국은 전진의 부견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십익건의 손자인 탁발규(拓拔珪)가 비수의 전투 이후 전진을 몰락을 틈타 대국을 부흥시키고 386년에 대왕에 즉위하였다. 395년에는 후연을 격파하여 황하 이북의 농경지와 요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화북의 농경지와 농민을 통치하게 되자 탁발규정권은 농업에 기반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수도를 평성(平城)으로 옮긴 후 북위(北魏)를 건국하였다(398). 탁박규는 후연의 정복민 약 36만을 평성 주변으로 강제 이주시킨 후 가족의 수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고, 경우를 지급하는 등의 방법으로 농업생산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이를 계구수전(計口授田)책이라고 한다. 이후의 정복전쟁에서도 피정복민을 신민(新民)으로서 계구수전하는 정책을 지속하였다.

북위가 여타 오호제국과 달랐던 점은 호족국가의 최대 약점이었던 호한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데 주력하였고, 유목민 특유의 봉건적 질서를 배제하고 중국식 집권적 국가체제를 지향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를 위해 선비족 대대로 지켜오던 부락조직을 포기하기까지 하였다. 즉 호족과 한족 구별없이 주현의 호적에 편입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래 군장(君長)이나 대인(大人)을 통한 간접지배의 방식에서 황제의 통치를 받는 국가의 백성으로 편재하려 한 것이었다. 또한 이런 원칙하에서 한족이라도 능력만 있다면 호족과 차별없이 발탁하여 관료제로의 길을 열었다. 이 때문에 황폐화된 화북에 남아 있던 귀족들이 북위의 조정에 나아갔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최호(崔浩)와 같은 산동귀족이었다.

도무제(道武帝) 탁발규의 뒤를 이은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을 공격하여 황하 이남까지 점령함으로써 국력을 신장시켰고, 남조에 대한 우위를 보였다. 다음 황제인 태무제(太武帝)는 마침내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오호제국을 모두 멸망시켜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였다. 중국식 천자가 되고자 했던 태무제는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기 위해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한족의 고관 최호와 도사 구겸지(寇謙之)의 권유가 있었다. 도교는 국교의 지위를 획득하였고, 반면 불교는 철저히 탄압받았다(446).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북위는 호족국가로서의 성격이 농후하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최호의 국사(國史)사건이다. 태무제는 431년에 칙령을 내려 산동지방의 명사 수백명을 초빙하여 관직을 주었다. 이 때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문벌귀족은 북위왕조의 부름에 따라 관직을 받았다. 따라서 중국식 국가의 성립을 확신한 최호는 북위의 국사를 편찬하면서 북위 왕실 중 다루지 않아야 좋을 역사적 사건을 직필하였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최호를 처벌하였고, 인척인 여러 문벌도 이에 연루되었다. 이는 북위의 군주가 중국식 역사편찬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고, 또 최호 역시 호족정권으로서의 북위의 기본 속성을 간과했다는 데에도 있다.

구겸지와 최호, 태무제가 세상을 떠나고 불교신자인 문성제가 황제가 되자 불교는 다시 부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폐불의 경험을 겪은 불교교단은 북위황제의 권위를 교의로서 원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그로써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국가불교로 모습을 바꾸었다. 이는 한초 유교가 국가유교화하는 과정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교의 융성을 바탕으로 당시의 수도였던 평성에 대규모 석굴사원이 조성되었다. 운강(雲崗)석굴이 그 실례인데, 현존하는 주요 동굴은 40여개, 조각된 불상은 5만개 이상에 달한다.


6.5.2. 효문제시기 대민통치의 재편과 한화정책

헌문제의 사후에 5세의 나이로 즉위한 효문제 통치기간의 전기는 문성제의 황후 풍태후(馮太后, 文明太后)가 섭정하던 시기였다. 풍태후는 북위국가의 성격을 중국식 집권국가로 변모시키는 정책에 착수했다. 그 주요한 정책은 균전제와 삼장제였다. 485년에 공포된 균전제는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진 농경지를 노동력을 갖춘 몰락농민에게 분배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을 높여 안정적인 세수와 요역의 확보를 꾀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앞서 484년에 효문제는 관리에 대한 봉록제를 실시하여 관리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당시까지 집권적 관료조직을 갖지 못한 북위는 관리들의 모든 비용을 각 부서내에서 자급자족적인 원칙에 따라 충당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관리들은 멋대로 세금을 거두어 원성이 높았기 때문에, 백성으로부터 일반적인 조세 이외에 1호당 백(帛) 3필과 속(粟) 2석9두를 받아 관리의 관품에 따른 봉록에 충당하였다.

485년 한족관료인 이안세(李安世)의 건의에 따라 시행한 균전제의 내용은 15세에서 70세까지의 성인을 대상으로 남자 40무(畝), 여자 20무의 노전(露田)을 지급하고, 마전(麻田)은 남자 10무, 여자는 5무를 지급한다. 이 토지들은 70세가 되거나 사망시 국가에 반환해야 하는 토지였다. 마 경작이 어려운 토지일 경우 상전(桑田)을 지급하는 데 성인 남자가 20무를 지급받았다. 이외에 3인마다 원택지(園宅地)를 1무 지급하였다. 보통 노전의 경우 휴경을 고려해 같은 액수의 전지(田地)를 배전(倍田)으로 지급하였다. 또한 노비에게도 성인 남녀와 같은 액수의 노전이 지급되었고, 경우(耕牛)에게도 1마리 당 30무의 노전을 4마리에 한해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노비나 경우에게 지급할 경우 그 토지를 실제 분배받는 것은 노비나 경우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합법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균전제의 실시 목적이 토지소유의 제한이라는 것보다 농업생산력의 회복과 징세원의 확보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균전제 시행 이후 부부를 단위로 하여 백(帛) 1필과 속(粟) 2석조조(租調)를 부담하였고, 미혼남성일 경우 1/4, 노비일 경우 1/8, 경우는 1/20을 납부하였다.

이러한 균전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전국에 걸친 토지소유의 현황과 성별·연령별로 자세하고 거짓이 없는 호적이 작성되어야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삼장제(三長制)를 실시하였다. 삼장제는 5가(家)를 1린(隣)으로 하고 5린을 1리(里), 5리를 1당(黨)으로 조직하고, 각각 인장, 이장, 당장을 두어 호적의 작성과 조세의 징수 및 요역의 징발, 치안유지의 책임을 맡기는 인보제(隣保制)였다. 이는 종래 종주(宗主)라는 존재가 지역사회를 장악하고 있어 집권적인 체제의 수립에 장애가 되고 있던 것을 개선한 것이다. 당시 북위에서는 이들이 백성을 은닉호구로 삼아 관역(官役)을 회피하였으며, 심지어 30가(家)나 50가가 1호(戶)를 구성하는 경우까지 있어, 조세수입과 일반 민호에 대한 장악력이 저하된 상태였다. 삼장제는 향리의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호적의 정리작업을 통해 집권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이 균전제와 삼장제는 이후 북조를 이어 수당대에서 약간 형태는 차이가 있지만 계승되었다.

효문제가 친정을 시작한 이후 낙양으로 수도의 이전을 계획했다. 473년 효문제는 낙양으로 가서 성의 재건을 개시하고 중원으로 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 천도계획에는 선비계 귀족의 반발이 극심해 495년 선비족 대관 목태(穆泰)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474년 효문제는 남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보병과 기병 30만을 이끌고 수도인 평성을 출발하였는데, 이를 수행한 고위관료는 81명이었다. 그중 40명이 한족이었고 나머지는 호족이었고, 호족 중 반은 탁발씨 황족의 직계였다. 효문제는 495년 낙양에 입성하여 천도를 강행하였다. 효문제에 의해 재건된 낙양성은 501년에 이르러 그 바깥에 동서 20리, 남북 15리에 걸친 외성읠 건설해 모습을 쇄신하였다. 낙양의 모습은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특히 사찰이 많아 북위말에는 1,30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낙양의 남쪽 교외에는 운강석굴을 계승하여 장대한 용문석굴(龍門石窟)이 조성되었다.

낙양으로 천도하자 마자 효문제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적극 추진하였다. 선비족 풍속과 언어 및 의복을 폐지하고, 남으로 이주한 귀족들의 본관을 낙양으로 옮겼다. 496년에는 탁발이라는 자신의 성을 호성(胡姓)이라는 이유로 포기하고 원(元)이라는 한족풍의 성(漢姓)으로 바꾸었다. 이를 모범으로 하여 다른 선비계 부족들에게 한족의 성을 부여하였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성만 해도 193개의 새로운 성이 생겨났다. 또한 중국의 가족법에 따라 동성은 결혼할 수 없으며, 이성일 경우 양자를 삼지 않는다는 금기로 호족에게 적용되었다. 효문제는 이와 함께 호족과 한족의 통혼을 적극 장려하여 자신부터 최씨나 노씨 등 한족 명문의 딸을 아내로 맞아 후궁으로 삼았고, 선비 귀족인 자도 동등한 가문의 한족과 통혼관계를 맺도록 하였다.

효문제는 남조와 같은 문벌사회를 지향해 성족상정(姓族詳定)을 단행하였다. 부족 대인의 혈통과 선조 3대에 걸쳐 몇 명의 고관을 배출했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호족과 한족 각각 가격(家格)의 차등을 두고 관리의 임용이나 통혼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는 각족의 가격을 서열화·계층화한 것인데, 한족으로는 박릉(博陵) 최씨(崔氏), 범양(范陽) 노씨(盧氏), 형양(滎陽) 정씨(鄭氏), 태원(太原) 왕씨(王氏)가 천하 제일의 명문인 관족(冠族)으로 인정되었고, 호족으로는 110개의 성 가운데 목씨(穆氏), 육씨(陸氏), 하씨(賀氏), 유씨(劉氏), 누씨(樓氏), 우씨(于氏), 혜씨( 氏), 위씨(尉氏))의 8성이 관족으로 인정되었다. 한족의 경우 조군(趙郡) 이씨(李氏)와 농서( 西) 이씨(李氏)를 포함해 5성을 들기도 한다. 이들 외에는 호한을 구분하지 않고 갑·을·병·정의 4등급으로 차등화하였다.

495년의 관제개혁에도 이러한 문벌주의적인 경향이 반영되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청관(淸官)과 탁관(濁官)의 구별, 유내관(流內官)과 유외관의 구별이 설정되었다. 청관과 탁관의 구별이란 동일한 관품의 관직이라도 명족의 자제를 위한 직책과 그렇지 않은 가문 출신자를 위한 잭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유내관과 유외관의 차이는 귀족과 서인의 관직을 별개의 체계로 만든 것이다. 결국 관제에서도 귀족제와 문벌주의에 의한 지배원리가 등장하였다. 귀족제의 정비와 함께 효문제는 구품관인법의 전면적인 실시에도 착수하였다. 구품관인법은 일부 오호제국에서도 실시된 바 있었는데, 북위에서는 중정관의 임무가 주군의 속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중앙관의 임명도 취급하도록 개정하였다.

이는 북조에서도 문벌귀족이 탄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북조의 문벌귀족은 양진과 남조의 귀족과는 차이가 있다. 북조의 귀족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인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가격의 인정도 관료기구를 통한 국가에의 공헌도가 평가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군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중국 전역을 통치하는 황제가 되기를 원했던 효문제는 말년에 남조에 대한 친정(親征)에 전력을 쏟았다. 그러나 499년 원정 도중에 3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6.6. 귀족사회의 재편

6.6.1. 육진의 반란과 동·서위의 분열

효문제의 문벌주의와 한화정책은 북조 권력을 지탱해주던 병사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519년에 우림(羽林)·호분(虎賁)의 병사 약 1천여 명이 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림과 호분은 평성에서 낙양으로 이주한 선비족의 자손에서 선발된 정예군이었는데, 승진이 문관에 비해 불리하였기 때문에 봉기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524년에 북변에 두어진 육진 중 옥야진(沃野鎭)의 병사 파락한발릉(破落汗拔陵)이 주장을 살해하고 봉기하자 반란은 북변 전체로 확대되었다. 육진이란 북위초 평성을 몽골고원의 고차(高車)족과 유연(柔然)족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해 두어졌는데, 처음에는 선비족의 명문 출신과 귀부한 한족 호족의 자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 그들에 대한 대우가 열악해져 중앙에서 파견된 진장(鎭將)들에게 천시되고 구사되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이 불만이 폭발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효문제시기의 여러 정책에 대한 반발적 성격도 있었다.

파락한발릉의 군대는 북위와 유연의 군에게 패배하여 그 부하들은 하북 각지에 분산되었지만, 유현진(柔玄鎭) 출신의 두락주(杜洛周)와 선우수례(鮮于修禮)가 병사를 수합했고, 수례가 죽은 후 갈영(葛榮)이 전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수도 낙양을 위협했다. 이때 갈영의 군대를 격파하고 등장한 인물이 산서(山西)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갈족( 族)의 추장 이주영(爾朱榮)이었다.

당시 북위의 조정에서는 영태후(靈太后)파와 숙종(肅宗)파간의 대립이 있었는데, 숙종파가 이주영에게 의지하려고 하자 영태후파는 숙종을 독살해 버렸다. 이주영은 이를 알고 병사를 거느리고 낙양에 진입하여 영태후를 체포해 황하에 던졌고 신하 2천여 명을 살해했다(528년). 이를 하음(河陰)의 변(變)이라 한다. 이후 북위 영내의 반란은 거의 이주영에 의해 마무리되었지만, 이 사건은 북위의 귀족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이주영이 세운 효장제(孝莊帝)를 끌어들여 이주영이 입조(入朝)한 틈을 타 그를 살해했다. 그러자 이주영의 뒤를 이은 이주조(爾朱兆)는 다시 병사를 거느리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를 죽이고 절민제(節閔帝)를 옹립했다.

이주씨의 부하 중에는 북진의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반드시 이주씨에게 심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중 회삭진(懷朔鎭) 출신의 고관(高歡)은 하북의 한인 호족과 결합하여 이주씨를 멸망시키고 낙양에 들어가 효무제(孝武帝)를 세웠다. 그러나 효무제는 고환을 꺼려 장안에 있던 우문태(宇文泰)에게 도피하였다. 그러자 고환은 대신 효정제(孝靜帝)를 세우고 수도를 업( )으로 옮겼다(534년)

장안의 우문태는 원래 무천진(武川鎭) 출신으로 이주영의 일족인 이주천광(爾朱天光)을 따랐지만, 이주영이 죽고 이주천관이 복귀한 후 그 지역의 실권자가 되었다. 이후 효무제를 독살하고 문제(文帝)를 세웠다(535년). 이로써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


6.6.2. 북제·북주의 대립과 관롱집단의 대두

동위와 서위의 실력자 두사람은 모두 육진의 반란에서 기반을 얻었기 때문에 두 왕조 초기에는 한화정책에 대한 반동이 나타났다. 동위에서는 훈귀(勳貴)라 불리는 군인의 세력이 강했으나, 고씨의 권력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훈귀들의 세력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고환의 뒤를 이은 고징(高澄)과 그의 동생 고양(高洋)은 훈귀의 세력 억제에 나섰다. 동위 영토였던 하북과 산동·하남 지역은 원래 문벌귀족의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고씨의 훈귀억제를 기회로 한인 관료가 대두했다. 그러나 양 세력의 대립은 결국 조정될 수 없었고, 그 틈을 타 일부 총신이 정치를 부패시켰다.

고양은 550년 허수아비 황제를 폐위시키고 자립하여 북제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앞서의 사정 때문에 국정이 잘 이끌어지지 않았던지 만년에 폭군으로 이름을 날렸다.

반면 서위의 우문태는 원래 거느리고 있던 선비병이 적었기 때문에 섬서와 감숙지방의 한인 호족의 원조를 받았지만 이 지방의 호족은 일류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문벌사회의 압력은 북제만큼 강하지 않았다. 우문태는 이른바 노성재행(虜姓再行)을 행하여 호족이 가지고 있던 한성을 원래 호족의 성으로 하고 한족의 신하에게도 호족의 성을 주었는데, 이것은 한화정책에 대한 반동의 일면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북위 건국시 유래있는 성을 우문태정권에 대한 공적의 대소에 따라 준 것이기 때문에 우문씨정권 아래에서 호한을 포함한 씨족의 질서를 편성하여 새로운 국가귀족을 만들어내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우문태의 국가가 호족의 반동으로만 끝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중국의 고전 『주례』에 따라 관제를 정한 바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중국 전래의 통치방식을 배워 황제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인 듯하다. 그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육군에 편성된 군대이다. 우문태는 한인호족이 향토방위를 위해 조직한 농민병(鄕兵)을 자기의 군대에 편입시켜 병력확충을 꾀했다. 우문태의 말년에 24군이 있었는데, 보통 이것을 이후 부병제의 선구라 한다. 다만 서위의 군적은 일반 민호의 호적과는 별도였으므로 수당처럼 완전한 의미에서의 병농일치는 아니었다.

우문태는 이 부병을 자기의 공신인 신귀족에게 장악시켰다. 즉 신귀족의 제 1위였던 것은 8주국(八柱國. 8인의 柱國大將軍)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가운데 우문태 자신과 황족인 원흔(元欣)을 제외하고 다른 6주국에 24군을 4군씩 나누어 장악케 하였고, 그 아래에 12대장군(十二大將軍)을 두어 2군씩 거느리게 하고, 다시 그 아래에 24인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두어 각기 1군씩 관장하였다.

8주국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호(李虎)는 당조의 건국자인 이연의 조부였고, 12대장군의 한사람이었던 양충(楊忠)은 수조의 건국자인 양견의 아버지였다. 따라서 북주와 수당의 건국자 및 지배층은 모두 8주국과 12대장군 출신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서로 통혼을 통해 결속력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8주국의 일인이었던 독고신(獨孤信)은 장녀를 우문태의 장자인 북주의 명제(明帝)에게 출가시켰고, 4녀를 이호의 아들이자 이연의 아버지인 이병(李昞)에게 출가시켰으며, 7녀는 수 양견의 황후가 되었다. 즉 독고신은 3대에 걸친 외척이었고, 이처럼 서위에서 북주와 수당의 지배층은 모두 우문태의 신귀족 출신이었고, 이들은 지역적으로 관롱(關 , 관은 섬서성, 롱은 감숙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진인각(陳寅恪)이라는 학자는 이들 신귀족을 '관롱집단'이라고 불러 이 집단을 특징지웠다. 이들은 호족의 색채가 강한 북조의 문벌이 되었고, 수당에 이르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557년 우문태가 형의 아들이었던 우문호(宇文護)에게 후사를 맡기고 죽자, 우문호는 우문태의 3자였던 우문각(宇文覺, 孝閔帝)를 세워 북주왕조를 세웠다. 국명은 고대의 주왕조를 딴 것이고, 우문호 스스로는 주공에 비견될 정도로 세도가 있었다. 이후 우문각을 죽이고 장자인 명제를 세웠다가 다시 죽이고 4자인 우문옹(宇文邕)을 세웠다(560년). 이가 북주의 무제로서 화북의 통일을 달성한 인물이다.

무제는 188세로 즉위하였지만 아직 정권은 우문호의 수중에 있었다. 무제도 형과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에는 일체 간여하지 않다가 친정의 기회가 오자 우문호를 타도하였다(572년). 권력을 장악하자 부국강병을 기치로 내걸고 체제의 정비에 나섰다.

이보다 앞서 북제와 북주에서는 요역이 면제된 승려의 수가 전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고 불사의 건립은 일반민의 고역이 되어 있었다. 이를 기회로하여 승려 출신인 위원숭(위원숭)이라는 인물이 불사의 폐지를 건의하였고, 무제는 친정하게 되자 재정적인 측면과 호구에 대한 직접 장악을 통한 집권화를 위해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였다. 574년에 북위의 태무제에 이어 2번째의 폐불이 단행되었다. 이 때는 도교도 탄압받았다. 그 대신 통도관(통도관)이라는 연구기관이 두고 소수의 승려와 도사를 두어 진리를 탐구시켰다. 이것은 유·불·도를 초월하여 진리는 하나라는 사고가 있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집권화와 체제개혁을 추진하던 무제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

577년 무제는 북제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또 남조 진으로부터는 양자강 이북의 영토를 빼앗았다. 무제는 다음으로 북방의 돌궐을 토벌한 후 강남을 정복하여 전 중국을 통일하려고 하였지만 다음해 병으로 36세의 생애를 마쳤다. 이후의 통일을 달성하는 과제는 북주를 이은 수왕조로 이어졌다.


6.7. 위진남북조의 종교와 예술

6.7.1. 육조 귀족문화와 문학

중국이 남북으로 크게 분열해 있던 이 시대, 학술을 비롯한 문화도 남북으로 양상을 달리 했다. 북조에서는 질박하고 고풍스런 자태를 남기고 있는 데 대하여, 남조에서는 화려한 귀족문화가 전개되었다. 문벌귀족화해 있던 당시의 사인들은 정치의 실권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면서도 관직이 대부분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이상, 위험이 따르는 정권의 중추로부터 가능한한 멀어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고 개인의 내면생활에 침잠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학술은, 현실의 장(場)에서 실용과 실익을 위해 하는 것은 천하게 여겼고, 오로지 세련되고 귀족다운 교양을 과시하기 위한 학술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귀족적인 교양 또는 소양으로서의 학술, 그리고 결국 귀족적인 체제를 장식하고 유지하기 위한 학술이었고 보면, 깊은 지식보다는 폭넓은 지식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학술은 현(玄)·유(儒)·문(文)·사(史)라 칭해지는 4개 학문 분야로 확대되고 있는데, 이들 전반에 통달한 폭넓은 교양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귀족의 이상으로 여겨졌다.

한편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현실에 대한 관심의 쇠퇴는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측면으로 기울어졌다. 동진 이래 불교 신앙이 더욱 확대되면서 불교는 곧 성령(性靈)의 진오(眞奧)를 구하는 길로 의식되면서 사인의 내면 생활의 중추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의 사상·종교상의 문제는 대부분 불교를 둘러싸고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의 이러한 동향에 자극받아 중국 토착의 종교인 도교가 대성하게 되었다. 여기에 종래의 유교(儒學)를 더하여 유·도·불의 삼교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병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찌기 유학에 의거한 예속(禮俗)에의 비판을 위주로 한 노장의 무위자연은 당시 유학과 타협해 예속 그대로를 자연으로 간주하는 방향으로 흘러 현상을 용인하고 현재 있는 그대로의 현실 위에 안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학이라 해도 거의 사상적인 전개를 보이는 일 없이 오직 귀족적인 사교의 장에서 재주와 변론을 과시하기 위한 소재를 제공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남조 양대에는 현학의 풍조가 재차 성행하게 되어 『노자』『장자』와 유학의 『주역』을 합하여 삼현(三玄)이라 칭하고 삼현의 담론과 강설이 빈번히 개최되었다.

유학에 관해서는, 유가 경전을 이해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주석이 남북에서 서로 달랐다. 북조에서는 정현의 주를 위주로 하는 후한말의 경학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 데 대하여, 남조에서는『주역』의 왕필(王弼) 주, 『좌전』의 두예(杜預) 주 등 비교적 자유로운 경전 해석이 행해졌던 위진의 새로운 경학이 호응을 받고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경전에 부가된 주석의 의미를 한층 더 부연하면서 해석하는 의소(義疏)라는 형식이 등장하였다. 지금은 그 중에서 황간(黃侃, 488-545)의 『논어의소(論語義疏)』만이 완본으로 남아있다. 본시 의소라는 형식 자체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황간도『논어』의 경문해석에 불교지식을 응용하는 등 당시의 불교 전성의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유학이 이 시대에 권위를 지닌 교양의 기초였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시대를 주도하는 것과 같은 정신은 이미 잃어버리고 단지 학술적인 지식으로서 추구되는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극히 부진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귀족의 몸가짐으로서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친 예의범절이 상세하게 규정된 상장의례(喪葬儀禮)를 비롯한 예학만은 발전하였다.

반면 문학과 사학은 시대적인 혼란과 맞물려 더욱 발전하였다. 사학은 본래 유학의 일환으로 의식되어 왔으나, 위진 시대 차츰 하나의 독립된 학문분야로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서술의 측면에서 사학은 문학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남조 문학의 융성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이 시대에는 시와 부(賦), 산문이 모두 쓰여졌는데, 건안시대의 오언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동진의 노장사상을 노래한 관념적인 현언시(玄言詩)를 대신하여, 남조 송의 원가년간에는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을 읊은 산수시가 등장하여 시풍이 변화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령운(謝靈運, 385-433)으로, 세련된 감각으로 포착한 산수미의 수려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는 불교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으므로 그의 시 속에는 종교적인 감흥도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수사(修辭)에 관심을 쏟았고 기교적인 경향을 더하였다. 전원시인 도연명은 몰락귀족 출신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가 생활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남겼다.

그러한 가운데 남조 제에서는 심약 등의 문인 사이에서 한어에 본래 내재하는 사성(四聲)이 처음으로 명확하게 자각되어, 시를 짓는 데도 성율(聲律)의 조화가 고려되고 음성미가 추구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영명체(永明體)라 칭하는 것이다. 양대 후반에는 황태자 소강(蕭綱)의 주변에 모인 시인들이 궁체(宮體)라 칭하는 시풍을 형성했는데, 아름답고 고운 표현을 다투어 추구한 나머지 퇴폐적 경향까지 띠었다. 이런 경향의 시를 수집한 것이 서릉(徐陵, 507-83)의 『옥대신영(玉臺新詠)』이다.

시 이외의 문장으로는, 사육문(四六文)·병려문(騈儷文)·병문(騈文) 등으로 후세에 불리워졌던 문체가 성행하여 완성되었다. 사육병려문이란 한 구(句)가 4언·6언을 기조로 하여 짝을 이루는 구성을 취하고, 그위에 옛 고사를 많이 이용하며, 성율의 조화에 유의하여 올을 짜듯 엮어내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러한 수사가 남조를 통해 보다 정치(精緻)해지고, 영명년간에 성률에 대한 자각은 또한 병려문을 완성의 영역으로까지 높였다. 이후 병려문은 양·진시기에 최고로 성행하였지만, 오로지 수사(修辭)에만 골몰하는 병려문은, 자신이 만들어낸 형식에 속박되어 내용적으로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양대에는 소명태자 소통(蕭統, 501-531)에 의해 주대 이래의 각종 문체의 작품을 모은 사화집(詞華集) 『문선(文選)』이 편찬되었다. 또한 문학의 발달에 따라 문학이론과 평론도 발달하여 삼국시대 조비의 『전론(典論)』을 효시로, 부의 체체로 문학이론을 설명한 육기(陸機)의 『문부(文賦)』, 체계적인 전문적 문학이론서인 유협(劉 )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오언시를 비평한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등이 저술되었다.

위진남북조시기에는 사학의 풍조가 관찬사서에서 사찬(私撰)로 옮겨져 개인이 역사를 저술하는 경향이 늘어났고, 문장 또한 전대보다 세련되었다. 대표적으로는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와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가 있다.이와 아울러 이전의 사서에 주를 다는 주석학(注釋學)도 유행하여 남조 송의 배송지(裴松之)의 『삼국지주(注)』와 배인(裴 )의 『사기집주(集注)』는 원서에는 없는 풍부한 사료를 제공하였다. 북위의 최홍은 기존 십육국에 대한 자료를 집대성하여 『십육국춘추』를 지었다. 또한 지리서로 역도원( 道元)이 지은 『수경주(水經注)』는 후한말의 『수경』에 주를 단 것인데, 전국 1,252개의 주요 하천과 수로 및 그 수로가 지나는 지역의 역사, 풍토, 인정, 물산, 명승, 고적, 신화, 전설 등을 수록한 자료의 보고이다. 또한 사천지역의 연혁을 기록한 상거(常 )의 『화양국지(華陽國志)』와 전술한 양현지의 『낙양가람기』 또한 지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귀족사회였던 당시 귀족 집안의 교양과 교훈을 전하는 보학(譜學) 역시 발달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안지추(顔之推, 531-91)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이다. 안지추는 남조 양말의 전란시기에 살았던 인물로서 처음 양의 관직에 나아갔다가 후경과 서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곧 서위를 탈출하여 북제로 도망가 황문시랑(黃門侍郞)이라는 고위관직을 지냈다. 이후 다시 북제가 멸망당한 후 북주와 수에서 관직을 가졌던 파란만장한 삶을 산 귀족인 그는, 이 전란의 과정에서 풍부한 생의 견문과 난세를 살아가는 고민을 『안씨가훈』으로 자손에게 전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남조 귀족의 퇴폐적 경향과 부패·무능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노장의 청담이나 현학이 아닌 유학적 교양이야말로 다음 시대의 학문임을 밝히고 있다.


6.7.2. 불교와 도교

불교는 후한 명제 때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들어왔지만, 당시는 유학의 전성기였고, 유학이 강조하는 중화의식 때문에 오랑캐의 종교였던 불교는 널리 전파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오호시대에 들어 불교는 유교를 누르고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서역승의 활동이 현저하였다. 이들은 오호의 군주와 결합해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4세기 전반에 석륵과 석호가 존경했던 쿠차(龜滋)의 불도징(佛圖澄)과 전진에서 활동하던 그 제자 도안(道安, 312-85), 후진(後秦) 요장(姚 )의 국사(國師)로 활동한 구마라집(鳩摩羅什, 350-409?) 등이다. 불도징은 후조의 정치·군사고문으로 활동하였고, 구마라집은 불경의 번역에 큰 업적을 남겼다. 당시 불교의 포교는 본래의 교의보다는 부처의 기적이나 영험담이 중심이어서 그 주술성과 신비성을 빌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 호족 군주의 본심이었다. 서역승은 이들 호족 군주의 수용태도에 따라 포교방식을 달리함으로써 쉽게 포교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후일 북조에서의 호국불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즉 국가불교화하는 단서를 열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남방에서도 유학의 쇠퇴하고 중화의식이 크게 흔들렸던 동진시대부터 불교가 일반인들에게도 수용되었는데,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노장사상을 통하여 이해되었다. 중국의 전적 특히 노장사상을 매개로 하여 불전을 해석한다는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풍조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동진 말 격의불교를 간신히 벗어나는 가운데, 도안과 그 제자인 혜원(慧遠, 334-416)에 의해서 중국불교의 초석이 놓여지게 된다. 특히 여산(廬山)에 자리잡은 혜원은 중국인들의 불교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전진의 수도 장안에서는 구마라집에 의해 불경번역이 행해져 대승·소승의 구별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후 남북조시대의 불교는 동진말의 상황을 계승하여 불교 독자의 길을 걷게 된다. 남조에서는 번역된 불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삼론종(三論宗), 성실종(成實宗), 비담종(毘曇宗), 열반종(涅槃宗), 지론종(地論宗), 섭론종(攝論宗) 등의 종파가 형성되었다. 이렇듯 남조에서는 주로 각종 종파를 중심으로 학파가 분립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실제 생활에서의 지침이 될 수 있는 바를 불교에서 구하였던 북조에서는, 학문지식 보다도 참선(參禪)·지계(持戒) 등의 실천 수도가 중시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아직 세력을 지닐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후세 선종(禪宗)의 원류를 이룬 인물이 바로 북위 낙양에 있던 인도승 달마(達摩)라는 점, 그리고 또 정토교(淨土敎)의 시조 담란(曇鸞, 476-542?)을 낳았다는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또한 남조의 불교가 왕권 밖에서 어느 정도의 자립성을 보유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조의 불교는 국가권력에 의해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전제적인 황제권과 충돌해 불교가 정치와 사회 교화의 장애로 간주되는 경우에는 폐불이 일어났다.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法難)이라 불리우는 중국 역사상 4차례의 대규모 폐불사건 가운데 처음과 두번째는 북위 태무제(446)와 북주 무제(574)에 의한 것으로, 특히 후자는 불교계에 철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 이 폐불을 계기로 하여 남북조의 여러 학파를 섭취 소화하는 것은 물론, 한층더 그것을 극복하여 교학과 실천을 겸비한 중국 불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불교 각 종파의 흐름과는 달리 일반의 사인에게 불교란 삼세응보의 가르침, 즉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걸쳐서 생사를 반복하면서(輪廻轉生) 자신의 행위의 선악에 따라 응보를 받는 것(因果應報)을 설명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졌다. 동진말의 혜원(慧遠)은, 행위의 선악에는 그 응보를 곧바로 현세에서 받는 것, 내세에서 받는 것, 여러 생을 거친 후 받는 것 이라는 삼보(三報)의 구별이 있다고 논하였다(삼세응보설). 불교에서는 무한한 시간속에서 인과응보가 계속 일어난다고 함으로써 선악과 길흉화복 사이의 모순을 이론적으로 해결할 수가 있었다. 결국 삼세응보설은 종래 유고와 도교에서 부족했던 인생관의 공백을 채워주었고, 그런 이유로 동진말부터 남북조에 걸쳐서 일반 사인 사이에 불교의 근본 교의로서 널리 침투하게 되었다.

이 삼세응보설을 둘러싸고 유·불 ·도교 사이에 치열한 논쟁도 전개되었다. 불교 측에서는 윤회전생을 반복하는 것은 그 윤회의 주체가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는 예상 아래, 사람이 죽어서 육체가 없어져도 신(靈魂)은 멸하지 않고 차례로 새로운 육체에 깃들어 영구히 존속한다고 보는 신불멸론이 주장되었다. 이 삼세응보와 신불멸에 대하여 불교를 배척하는 측에 선 사람들은 응보를 부정하고 신불멸에 대하여는 신멸로 응수하였다. 특히 신멸·불멸의 논의는 불교의 존립과 관계있는 것으로 의식되었기 때문에 반복을 거듭하였다. 그중에서도 남조 제·양 시기 신멸을 주창하였던 범진(范縝)은 형(形)과 신(神)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형이 멸하면 신도 소멸한다는 신멸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설은 모두 숭불로 향하고 있었던 당시의 사상계를 놀라게 하고 여러가지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남북조시대에는 또 외래의 불교에 자극을 받아 중국의 토착종교인 도교가 자각을 높이면서, 지금까지 각각 독자로 전해지고 있었던 교법도 하나의 종교로서 통합되는 방향으로 향한다. 후한말의 오두미도와 태평도를 거쳐 점차 종교로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도교는 원래 신선장생설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신앙을 도교에 가탁한 것이었으나, 점차 불교의 융성에 자극을 받아 조직을 갖추어 나아갔다. 아울러 위진시대 청담(淸談)의 유행과 신선이 되기 위한 선약(仙藥)의 제조법과 복용법, 장생술 등을 서술한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는 도교의 확립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북조의 도교는 북위의 구겸지(寇謙之, 365-448) 때 이민족 왕조에 대한 정통성을 제공함으로써 신천사도(新天師道)를 국교로 만들고, 국가도교의 조직을 완성하였다. 반면 남조의 도교는 송의 육수정(陸修靜, 406-477)을 거쳐 양의 도홍경(陶弘景, 456-536)에 의한 모산파(茅山派) 도교가 대성하게 되었다. 점차 융성의 기운이 높아진 도교측은 "도교와 불교는 궁극의 진리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각각의 교화 대상이 되는 세속의 풍속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도교가 중화의 습속에 적응된 가르침인데 대하여, 불교는 융적(戎狄)의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만든 것에 불과하기 떄문에 오랑캐의 종교인 불교를 쫓아서는 안된다"는 이하론(夷夏論)을 제기하여 불교를 공격하였다(467).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리의 깊이에 있어서는 불교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교의 사상이나 유교의 예를 모방하여 교학을 정비하게 되었다.


6.7.3. 남북조의 예술과 과학

남북조시대 이후의 미술을 그 이전과 뚜렷이 차이나게 만드는 것은 불교일 것이다. 석굴사원으로 대표되는 불교 조각은 이 시대 미술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 들어온 종교는 하나의 전환기를 맞은 중국미술 전체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 중국 미술, 특히 회화가 독특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였다.

불교 미술은 중앙아시아로부터 돈황(敦煌), 그리고 하서(河西) 지역을 지나 중원지대에 이르는 당시의 교역 루트를 따라 점점이 남아 있는 석굴사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도 질과 양 모두 중요한 석굴사원은 돈황의 막고굴(莫高窟)이다. 동서교통의 요충으로서 번영하였던 돈황에는 일찍부터 불교가 전해지고 불교학도 매우 성행하였다. 돈황 교외의 명사산(鳴沙山)에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경부터라고 한다. 석굴의 기본 구성은 내부에 채색된 소상(塑像)의 불상 여러 기를 안치하고, 중앙아시아와 간다라에서 유행한 불전도(佛傳圖)와 본생도(本生圖)를 벽면에 띠모양으로 빈틈없이 그려놓았으며, 천정에도 여러가지 회화와 장식을 해놓았다. 초기의 벽화는 중앙아시아의 기질 석굴식의 강한 청홍색 선을 넣은 화풍이었으나, 얼마 후 서서히 묵선에 의한 윤곽선을 보이는 중국풍의 작품이 나타나고 이후 당대에는 돈황이 당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화풍이나 화제(畵題)도 장안과 낙양 등 중원지역의 유행을 직접 반영하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하서 지역에 성행하였던 석굴사원의 조영은 중국 북부를 통일한 북위에 의해서 대규모로 중국 영내에도 행해지게 되었다. 압도적 다수인 한족은 물론 여타 소수민족을 지배하는 통일이념으로서 적극적으로 불교를 이용한 선비족의 북위가 돈황으로부터 북위의 수도 평성(平城, 현재 大同)으로 갔던 승려 담요(曇曜)의 권고에 의해, 대동 교외 운강(雲崗)에 소위 담요오굴(曇曜五窟)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은 460년의 일이었다. 이 석굴사원의 조영에는 북위의 지배하에 들어왔던 돈황으로부터 많은 공인이 이주하여 일을 맡았기 때문에 불상은 조상(彫像)이면서도 진흙으로 빚은 듯이 소상적(塑像的)이어서 조상적 입체감은 부족하다. 인도의 굽타 양식이 나타나 있는 이들 담요오굴 불상의 당당한 작품성에서 신흥의 이민족 국가 북위의 젊음에 넘친 자신감을 느낄 수 있다. 북위에는 이후 일시적으로 폐불이 행해지기도 하였으나 불교를 국가종교로 삼아 사원의 조영이 문화사업의 중핵을 이루어 갔다.

이후 북위는 철저한 한화정책을 취하고 수도를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낙양 교외의 용문(龍門)에 새로운 석굴사원을 조영되기 시작하여, 이후 당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석굴이 용문에 개착되었다. 용문은 운강과는 달리 단단한 석회암의 암질이었다. 따라서 개착공사 자체도 어려웠고 일시에 마무리 되지 않았던 석굴도 많았다. 불상의 용모는 갸름하여 운강처럼 밖으로 발산하는 명랑함이 사라지고 그 표정에는 우수와 준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외래적인 요소가 제거되어 입고 있는 옷도 중국식이다. 체형은 가늘어서 입체관 또는 사실적인 육체의 표현과는 거리가 멀고, 평면적이다. 북위의 낙양 천도 이후 용문 이외에도 낙양에서 황하를 따라내려간 공현(鞏縣)과, 산서의 태원 근교에 있는 천룡산(天龍山), 하북성 한단(邯鄲)의 향당산(響堂山), 또 산동성 각지에도 석굴사원이 계속하여 개착되었다. 이와같이 북조의 미술은 국가종교로서의 불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초기 인도의 강력한 영향에서 벗어나 점차 중국적인 양식을 확립해 갔다.

중원에서 강남으로 옮겨간 한인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혼란과는 상관없이 후세 육조문화로 동경되고 회고되었던 풍요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 최전성기는 양의 무제 시대였다. 유품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지만 중국 미술사상 남조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미술 특히 회화가 단순히 교화·장식 등의 실용적인 면만이 아니고 인간 최고의 정신생활의 하나로서 명확히 인식되었던 것은 남조에 있어서였다. 이 시기 중국의 미술은 고대적인 미술의 존재방식과 결별하여 이후 독자적으로 전개하여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기본적으로 방향지운 예술관이 나타났던 것도 이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을 구현했던 화가로서 중국을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인 동진의 고개지(顧愷之, 345-406)를 들 수 있다. 고개지는 박학다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일화를 남긴 외에 회화 제작에 관한 저작도 전하고 있다. 고개지 것으로 전하는 몇점의 작품 중 가장 원작의 유풍을 잘 전하고 있는 것은 「여사잠도권(女史箴圖卷)」이다. 가늘게 연면히 이어진 선에 의해 묘사된 흘러내리는 듯한 옷을 걸친 유연한 여상상은, 한대 분묘의 벽화와 화상석에 보이는 경쾌하기는 하면서도 어딘가 희화적(戱畵的)인 인물상과는 분명히 다른 세련된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다. 고개지의 작품이 그때까지의 회화와 전혀 다른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던 것은, 단순히 형태가 비슷해서만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장면의 정감이 긴밀한 공간 속에서 아주 사소한 표정과 몸짓에 의해 묘사되어 있는 점 때문이었다. 그것은 화가의 표현력과 더불어 안목높은 감상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예술의 본연의 자세이다. 남조의 귀족사회는 예술에 있어서 바로 그러한 사회였다.

고개지가 산수화에 있어서도 새로운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한 인상은 회화사 등의 자료에서 엿보이는 바이지만, 역시 이 시대의 통례로서 그도 인물화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산수는 본래 인물과 설화의 배경으로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육조시대에는 불교가 중국 고래의 신선사상을 촉발하여 자연관의 새로운 전개를 보게 된다. 문학에서는 사령운의 산수시가 선을 보인 것처럼, 미술에서도 종병(宗炳)에 의해 「화산수서(畵山水序)」가 지어졌으며 여기에는 고아한 정신 활동의 일환으로서의 산수화의 이념이 나타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은 당대를 거쳐 송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명확해진 자연관, 예술관은 그 후의 중국 미술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행하였다. 산수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측면을 묘사한 화조도(花鳥畵) 역시 불교미술에 사용되고 있던 식물무늬 장식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 시대에 한 분야로 확립되기 시작, 다음 시대의 발전을 향해 일보를 내디뎠던 것이다. 회화가 발달함에 따라 회화이론 또한 발전하여 고개지는 [화론(畵論)]을 비롯해 3편의 화론이 있었고, 남제 사혁(謝赫)의 『화품(畵品)』은 화론은 조직적으로 체계화한 작품이다.

서법도 동진 말년에 이르러 하나의 예술로 성장했다. 한대에는 전서(篆書)와 예서(隸書)가 위주였지만, 동진 이후에는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이 쓰여지고, 특히 서성(書聖)이라 일컬어지던 왕희지(王羲之)와 그 아들 왕헌지(王獻之)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왕희지의 대표작인 [난정서(蘭亭序)]는 특히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북조의 서법은 질박하고 힘이 있으며, 남조의 서법은 우아하고 수려했다.

과학 방면에서도 위의 유휘(劉徽)는 『구장산술』에 주를 달아 해석사면서 원주율을 정확히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조충지(祖 之)는 그의 성과를 기반으로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일곱 자리까지 계산해냈다고 한다. 수학이 발전하면서 천문학에서도 성과가 있어, 동진 시대에는 태양이 한바퀴 돌면서 생기는 세차(歲差)를 알아냈으며, 조충지는 이를 발전시켜 대명력(大明曆)을 만들었는데, 오늘날의 것과 약 50초 정도밖에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였다. 한편 의학에서도 서진의 왕숙화(王叔和)는 『맥경(脈經)』을 지어, 진맥법을 정리하였으며, 황보밀(皇甫謐)은 침구요법을 집대성하여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 12권을 지었다. 남조의 도홍경은 의약을 연구하여 한 대의 『신농본초경』을 보완한 『본초경집해(本草經集解)』를 지어 약학방면에 크게 공헌하였다. 농학면에서는 북위의 가사협(賈思 )이 지은 『제민요술(齊民要術)』이 뛰어났다. 그는 여기서 농법만이 아니라 종자의 선별, 파종, 식수, 원예, 가축사육, 양어, 양조 등 각 방면에 대한 기술을 펼치고 있다.  


은하철도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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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79년까지 '소년킹'에 연재되어 큰 호응을 얻었으며,
1978~81년에는 일본 후지 TV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영되었다.
국내에서도 여러차례 방영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소개
기계의 몸을 얻기 위해 '은하철도 999'를 타려하는 철이(일본이름 데츠로)와 의문의 여인 메텔의 우주여행을 다루고 있는 이 애니메이션은 우주를 여행하는 증기기관차라는 독특한 소재와 함께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소년기의 갈등과 자본주의 사회, 문명의 현실과 미래사회에 대한 세기말적 불안감과 공존하는 희망에 대한 주제를 표현함으로써 모든이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 네이버 지식백과 발췌 -



History of Galaxy Express 999

- 만화 (1977~1979) /'소년 킹'에 연재
- TV판 (1978.9.14~1981.4.9) /日本 후지 TV 방영/도에이 동화 제작
- 극장판 'The GALAXY EXPRESS 999' (1979.8.4) /129분
- 극장판 '안녕~은하철도999' (1981.8.1) /130분
- '79 일본 극장영화 흥행 랭킹 1위 (만화영화로서는 최초)
- '81 일본 극장영화 흥행 랭킹 8위 일본 역대 OST음반 판매 랭킹 2위
- NHK 당신이 고른 추억의 만화(COMIC) 랭킹 15위

본 포스트는 모아두었던 스크랩자료를 올리는 것 이며, 출처가 남아있는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천년여왕 & 아르카디아 & 999 & 하록 연표      09/05 15:32   418 line

《  마쓰모토 레이지 작품들간의 관련성  》


『1000년 여왕』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은하철도 999』
 『우주해적 캡틴 하록』

 reference from Toei, Tokumashoten
 written by mirugi (9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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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몇가지 논쟁이 있었던가  본데,  가장 간단한 답변으로서 마쓰모토 레이지 작품들간의 연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얘기를 한참늘어놓느라고 연표가 글의 상당히 후반부가 되어버렸지만...;;)

일단 답(?)을 말해놓자면,  『1000년 여왕』 →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 『은하철도 999』 
→ 『안녕 은하철도 999』 (극장판) → 『우주해적 캡틴 하록』 (TV판)의 순서입니다.

TV판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무한궤도 SSX』는 극장판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와 『은하철도 999』 사이를
연결해주는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단,  각 작품들에  확실히 나오는 연도를 잘 생각해보셔야 할 겁니다.  
『1000년 여왕』은  아시다시피 1999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작품이  가장 앞서고 있죠.  TV판 『우주해적 캡틴 하록』은 2979년부터 80년까지의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하철도 999』에서 중간에 사망하는 토치로의 생몰일이,  TV판 『우주해적 캡틴 하록』 제 1화에서
마유 (토치로의 딸)와 하록이 함께 토치로의 무덤에 갔을 때 화면에 나왔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2948-2970`이란 것이었죠.  이를 보아도 간단히 알 수 있듯이,  『은하철도 999』의 연도는 대략 2970년 전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녕 은하철도 999』는 거의 『은하철도 999』의 바로  직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고,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에서는  하록의 오른눈이  실명되는 과정이 나오니까, 결국 각 작품의 연도별 순서는 위에서 말한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이 1978년 3월 14일∼1979년 2월 13일에 TV 방영 되었고,
『은하철도 999』가 1978년 9월 14일∼1981년 3월 26일에, 
『신죽취물어 1000년 여왕』이 1981년  4월 16일∼1982년 3월 25일에, 
극장판 『안녕 은하철도 999   ―안드로메다 종착역―』아 1981년 8월 1일에 개봉하였고,  
극장판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가 1982년 7월 28일에, 
그리고 TV판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무한궤도 SSX』가 1982년 10월 13일∼1983년 3월 30일에 방영되었으니,
사실상 작품이 발표된 순서로는 가장  앞서는 『우주해적 캡틴 하록』이  실제 시간 순서로는 가장
뒷 얘기이고, 
『은하철도 999』보다 늦게 방영된 『1000년 여왕』이 시대상으로는 가장 앞선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작품들의 등장인물 상관 관계를 이 글 말미에 설명해놓겠으니 그것도 보시면
조금 더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후에 시간이 생기면 1953년부터 시작되는,  마쓰모토 레이지 만화에서 `하록`이란 이미지의  등장에 관해서도 얘기하고 싶습니다만...  (정확하게 `하록`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1968년도에 발표된 『광속 에스퍼』란 작품에서였습니다.
정식으로 『우주해적 캡틴 하록』이란 만화가 발표된것은 1977년이었죠.)  뭐 이제 와서 그 오래된 작품들을 일일이 보실 수 있는 
기회가 생기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그냥 한번쯤 설명해두는 형식이 되겠습니다만...



              【  松  本  零  士    작  품  연  표  】


1000년 여왕

유키노 야요이[雪野彌生],  아마모리 하지메[雨森始]와 만나다.
야요이는 하지메의 학교 선생님. 

1999년  라메탈성[ラ―メタル星],  지구에 접근. 라메탈성인과 싸워 격퇴.  위기를 피하다.

야요이 (메텔[メ―テル]),  영원의 여행(?)에 나서다. 



하록[ハ―ロック],  에메랄다스[エメラルダス]와 만나다.  (상세 불명)

하록,  에메랄다스를 통해 메텔과 알게 되다.  (상세 불명)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알루미다스[イルミダス]군,  지구를 제압.

토치로[トチロ―], 제 446기지의 지하 비밀 도크에서 아르카디아[アルカディア]호를 완성시킨다.

하록,  라 미메[ラ·ミ―メ]와 사령부에서 만나다.

하록,  식당에서 토치로의 모습을 보다.  그 후 난투 사건이 된다. 그것을 계기로 토치로와 친해진다.

조루[ゾル]에 의하여 과거의 사건을 보게 된다.

토치로,    우주무역인[宇宙貿易人]  퀸  에메랄다스와 만나다. 

하록,  마야[マ―ヤ]를 구하기 위해 총격전 속으로 뛰어든다. 오른눈 부상.  이후 오른눈 실명. 

에메랄다스,  마야,  일루미다스군에 붙잡혀 Y자가 {*역주 - Y자 모양으로 만든 막대.  十자 모양으로 만든 것은 십자가.}에매달린다.

마야,  중상을 입는다.

하록,  토카가성[トカ―ガ星]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토카가성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었다.

아르카디아호,  지구를 향하여 비행.  일루미다스 함대를 피해, 프로미넌스의 불 바다를 돌파. 

老 토카가 병사,  토카가성인[トカ―ガ星人] 사망. 

아르카디아호 지구 도착.  마야 사망. 

하록,  제다[ゼ―ダ]의 스타잣[スタ―ザット]호와 대결.  이것을 격파.

하록,  일루미다스 지구 침공군을 괴멸. 



토치로,  수수께끼의 인물과 함께,  데스섀도[デスシャドウ]호로 여행을 떠난다. (상세 불명)

하록,  일루미다스를 격퇴.  (상세 불명)

새로운 적이,  하록의 앞에 나타나다.  (상세 불명)



캡틴 하록

하록,  마존[マゾ―ン]의 존재를 알게 된다.

데스섀도호,  헤비 멜다[ヘビ―メルダ―]에 불시착.  (상세 불명)

하록,  쥬라성[ジュラ星]에서,  미메[ミ―メ]와 만나다.

미메,  라 미메를 대신하여 아르카디아호에 승선.  (상세 불명)

닥터 제로[ドクタ―·ゼロ],  아르카디아호에 승선.

야타란[ヤッタラン],  아르카디아호에 승선.

마치[魔地],  태양계연방 우주전함 브레이브스[ブレ―ブス]호하선후,  아르카디아호에 승선.

유키 케이[有紀螢],  화물선에 밀항중 체포된다.  아르카디아호의 습격시 따라간다. 

하록,  테쯔로[鐵郞]의 아버지 (흑기사 파우스트[ファウスト]와 알게 된다.  (상세 불명)


은하철도 999

테쯔로,  메가로폴리스[メガロポリス] 부근에서 기계백작에게모친을 살해당한다. 

테쯔로,  메가로폴리스에서 메텔과 만난다.

테쯔로,  메텔과 함께 999에 타고 안드로메다[アンドロメダ]로.  

테쯔로,  타이탄[タイタン]에서 토치로의 어머님께 모자,  망토,  코스모드라군[コスモドラグ―ン]을 받는다.

테쯔로,  에메랄다스와 만난다.

테쯔로,  헤비 멜다에서 토치로를 방문한다.

토치로 사망.  정신은 아르카디아호의 중추 大컴퓨터에 머문다.  

하록,  헤비 멜다에 도착.  폭한에게서 코스모드라군을 빼앗아 테쯔로에게 돌려준다.

테쯔로,  시간성[時間城]으로.  기계백작을 쓰러뜨린다.

테쯔로,  메텔성[メ―テル星]에 도착.  나사가 되어버릴 뻔 하지만 메텔에 의하여 구출된다.

닥터 반[ドクタ―·バン]에 의해 메텔성 붕괴.  테쯔로,  메텔과 함께 999로 탈출.

프로메슘[プロメシュ―ム],  테쯔로를 죽이려하지만,  크레아 [クレア]에게 저지당한다.  프로메슘,  크레아와 함께 사망.  

메텔,  메가로폴리스에서,  테쯔로와 헤어진다. 


안녕 은하철도 999

테쯔로,  파르티잔[パルチザン]이 되어,  기계화 제국과 싸운다. 

메텔에게서 메시지를 받는다.

테쯔로,  또다시 999를 타고 메텔을 찾아나선다.

테쯔로,  라메탈성에서 파르티잔 먀우다[ミャウダ―]와 만난다.  

테쯔로,  호반의 성에서 메텔의 집을 발견한다.

테쯔로,  플랫폼에서 메텔과 재회.  함께 999에 탄다.

테쯔로,  컨트롤 센터에서,  흑기사 파우스트와 대면.  자신의 과거를 보게 된다.

999,  대안드로메다성[大アンドロメダ星] (행성 프로메슘)에 도착. 

메텔,  프로메슘 Ⅱ세가 된다.

사이렌[サイレン]의 마녀,  안드로메다성부근에 나타나다.  

하록,  흑기사 파우스트와 재회.

테쯔로,  흑기사 파우스트와 대결.

흑기사 파우스트 사망.

테쯔로,  행성 모자이크[モザイク]에서 메텔과 헤어진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


2979년  마존의 페넌트[ペナント],  지상에 쏘아진다.

다이바[臺羽]박사,  마존의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다.

다이바 쇼[臺羽正],  하록과 알게 된다.

아르카디아호,  마존의 함대와 조우.

아르카디아호,  제 1해적섬에 기항.

하록,  브레이브스호를 구조하기 위해,  말머리 성운으로 향한다. 

아르카디아호,  미메의 고향 쥬라성에 들르다.

아르카디아호,  마존 중앙함대를 쫓지만,  반물질중력성 데스섀도[デスシャドウ]에 붙잡힌다.

하록,  옛 친구 아인[アイン]박사와 재회한다.

마존의 스파이,  나미노 시즈카[波野靜香],  킷타[切田] 장관을 속이고 아르카디아호에 승선한다. 

나미노 시즈카,  하록을 사랑해버려,  자살한다.

하록,  마유[まゆ]에게 중추 大컴퓨터가 아버지란 사실을 가르쳐준다.

하록,  여왕 라플레시아[ラフレシア]와 대결한다.

2980년  하록,  지구에 승무원을 내리고,  우주의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일단...  메텔과 1000년  여왕인 유키노 야요이는 동일 인물이란 사실은 잘 아시는 분도 많을 겁니다. 
뭐 그도 그럴 것이,  극장판 『1000년 여왕』이 개봉할 당시의  선전 카피가 바로 `1000년 여왕은 메텔이었다`였으니까요.
『1000년 여왕』의  마지막에서 야요이는 긴  여행을 떠나는데,  이것이 바로 메텔의 괴롭고도 긴  여행이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야요이=메텔의 부모는 누군가...   『은하철도 999』에서 테쯔로를 공격하다 결국 죽어버리는 프로메슘과,  닥터  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메텔입니다. 
이 닥터 반은,  마쯔모토 레이지의 만화 『미라이자 반[ミライザ·バン]』에 등장하는 닥터 반과 동일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00년 여왕』에 등장하는 여동생 세렌[セレン]이 바로 메텔의 여동생인 것이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좀  의아한 것은,   야요이는 1999년도의 인물이고, 메텔은 위에서 말했듯이
『은하철도 999』의 연대인 2970년도의 인물인데,  어떻게 동일인물인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요,  이는 매우 간단한 것이겠습니다.  
바로 야요이=메텔이 1000년 여왕이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1000년에 한 번씩 이 세상에 나타나는 1000년 여왕...(왠지 30년이나 일찍 나타난 것이 되지만.)

뭐 극장판 『안녕 은하철도  999』를 보신 분은 다들 아시겠지만,  테쯔로는 프로메슘의 부하인 흑기사 파우스트의 아들입니다. 
어머니 이름은호시노 카나에[星野加奈江]이죠. 그러면 파우스트의 성이 `호시노`라는 얘긴가... 
아니면 테쯔로는 어머니의 성을 따온 것인가...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기는데,   흑기사 파우스트의 선조가 결국 『1000년여왕』에 등장하는 아마모리 하지메인 셈인데, 
어째서 파우스트의 아들은 성이 `호시노`인 것인가...  ...역시 어머니의 성을 딴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우주해적 캡틴  하록』의 여자애 마유는 토치로의 딸이고, 토치로는 에메랄다스의 연인이죠.  
에메랄다스는 메텔의 친구이고,  메텔은 하록과 아는 사이입니다.
하록은 토치로와 친구고 에메랄다스와는동지이며,  호시노 테쯔로가 동경하는 존재입니다. 
호시노 테쯔로는 흑기사 파우스트의 아들이며,  흑기사 파우스트는 하록과 친구이며 프로메슘의 부하입니다. 
프로메슘은 메텔의 어머니이며,  메텔은 테쯔로의 연인입니다. 
『캡틴 하록』에서  하록이 데리고 다녔던 미메는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에 등장하는 라 미메의 언니입니다.


...복잡해 보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이해못할 정도는 아니긴 합니다.  
사실상 마쓰모토 레이지  작품들 사이사이에 그 힌트들은 많이 나타나고 있었으니까요. 
한꺼번에 나열해보니까 복잡해보일뿐...

극장판 『1000년  여왕』의 라스트 씬에서  영구관리인이 말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사람의 세상에 환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당신과 이 여왕은,  영원한 시간의 흐름이 접하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입니다."


999호에 타는 호시노 테쯔로는 분명히 『1000년 여왕』의 주인공 아마모리 하지메의 후예인 것이고, 
그의 어른이  되는 여행에 동참하는 여인 메텔은 바로 영원의  시간을 살아나가야만 하는 1000년 여왕인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또한,  이 `1000년의  사랑`과 함께 마쯔모토 레이지 작품을 이어나가는 또 다른 기반이 바로 하록과 토치로의 `1000년의 우정`이라고들 합니다.

마쯔모토 레이지의 만화  『다이버 제로[ダイバ―ゼロ]』에서 제로를 해골 깃발  아래로 부르는 하록도,  
애니메이션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야마토[ヤマト]의 위기에 홀연히 나타났던 얼굴까지를 온통 검은 옷으로 가린 남자도, 
분명히 우리가 아는 그 하록과 동일인물일 것입니다.

또한 `하록`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은,  
반드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의식`의  사제 역할이라는 것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로와의 만남,   고다이 스스무[古代進] {*역주 - 『우주전함 야마토』 의 주인공.}와의  만남, 테쯔로와의  만남,  그리고  다이바 쇼와의 만남... 
모든 만남이 전부 그런 것입니다.  소년을 `생[生]`으로 이끌고, 자기 자신은 `사[死]`를 짊어지는 양면성을 지닌 캐릭터...

그리고...  메텔과 하록간의 관계입니다. 
만화판 『은하철도 999』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오랜만이다`라는 식의 대화를 하고 있는데, 
메텔과 에메랄다스가  숙적이라는 사실은 만화판  『999』에 그려져 있지만, 메텔과 하록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쯔모토 레이지씨가 직접 말한 바에 따르면,  과거 「소년 킹」이란 잡지에서 연재되었다가  중도하차해버린 『아이란더 0[アイランダ―0[レ イ]]』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그려질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때의 구상에서는,  이야기  후반에서 일루미다스군이 등장하여 지구를 제압하는 내용으로 전개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즉,  이 『아이란더 0』가 시대적으로 『아르카디아』 직전의 이야기라는 것이죠. 
『아르카디아』 에서는 지구군의 함장으로서 데스 섀도호에서 일루미다스군과 싸우는 하록은,  회상 scene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아이란더 0』에서 그려질 것이었다는 얘기입니다.
하록과 메텔의 만남은,   하록이 아직 지구군에 있었을 당시라는 것으로서,  토치로와 하록이 알게 된 것보다도 더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한궤도 SSX』에서는  테쯔로의 아버지 흑기사 파우스트와 하록간의 만남이 그려져, 
극장판 『안녕 은하철도 999』에서 하록과 파우스트가 헤어질 때의 대사
"안녕히,  옛 친구여.[さらば舊(ふる)き友よ]" 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즉,   두 번에 걸쳐서  하록이 테쯔로의 싸움에  힘을 빌려주는 이유가,
바로 이 테쯔로의  아버지인 파우스트와의 우정도 배후에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하는 것입니다.

또한 82년도에 기획되었었던  애니메이션 『퀸 에메랄다스』에서는, 
『999』와 비슷한 시대의  에피소드들을 다룰 예정으로서 에메랄다스와 메텔간의 라이벌 관계와,
어째서 에메랄다스가 테쯔로를 도와주었는가... 하는 것이 밝혀질 예정이었다고 합니다만...


연도 얘기는 앞서도 했었습니다만,  TV판 『은하철도 999』의 헤비 멜다에서 토치로의 혼이 빛이 되어 날아가 아르카디아호의 메인 컴퓨터에 가게 된 것이고,
TV판에서만 등장하는 마유[まゆ]의 연령으로 보아 두 작품의 연도는 수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됩니다.
사실 마쯔모토씨는, 아 마유[まゆ]라는 캐릭터는 `귀여운 캐릭터를 내보내달라`는 요청으로 만든  것으로, 
본인으로서는 남자아이로 하고 싶었다고 말했었습니다.   즉,  소년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역할로서의 하록을 생각해보면, 
토치로의 아이는 남자아이였던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는 것이겠습니다.

그 외에도 마쯔모토씨의  작품 이곳 저곳에 등장하는  부리가 길고 목이 대단히 가느다란  새를 기억하시는지? 
이 새는 『아르카디아』에선 하록의 숙적으로  등장하는 조루의 애완동물로 등장합니다. 
『999』에서는 토치로의 임종시 옆에 서있죠.  TV판 『하록』에서는 아르카디아호에 타고 있습니다. 
1972년부터 75년까지 연재된 마쓰모토 레이지의 만화 『건 프론티어』에서는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하록과 토치로가 등장하는데,  이때에도 이 새가 있었습니다.
즉 이 당시부터 정확히  1000년에 걸쳐서 이 새는,  하록과 토치로의 우정을 바라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80년대 당시의 마쯔모토 레이지씨가 생각했던 마쯔모토 애니메이션의 마지막은,  그때까지  등장했던 모든 캐릭터,
즉 하록,  에메랄다스,  테쯔로,   메텔,  다이바 쇼 등등이  모두 힘을 모아,  새로운적과 싸우는 이야기로 기획했었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 작품이 바로 거대한 마쯔모토  레이지의 작품  세계를 푸는  열쇠가 될 예정이었습니다만...


뭐 어쨌든,  마쯔모토  레이지씨는 자신이 그려가는 작품들의 난해한 문제를 만들어가면서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1996 SEON JEONG-U·CHEONG-HYE PRESENTS.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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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ugi`s 美少年保護委員會]  http://www.mirugi.com/
AOS나 대전게임 등에서 주로 사용되는 ELO-RATING 매칭 방식인데...
원래는 엑셀에서 솔로 팀 까지 구성 하여 매칭을 시켜 볼까 하다가
너무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 하는 것 같아 그냥 계산기로 완료 지었음...

-클릭해서보면 크게보여요 o_O-

사용법:
  A ) 팀원에 대한 정보 입력
  B ) 일일이 수치입력이 귀찮을 경우 오른쪽의 랜덤값 채우기 버튼을 눌러 알아서 입력
  C ) 갈색 네모칸의 환경변수, 승점, 확율보정 수치를 조절하여 게임한판당 ELO계산값을 조정
  D ) 필터 설정해놓아서... 원하는 부분으로 오름차순, 내림차순 정렬 가능
  E ) 4명 이상일 경우 주황박스의 보정값이 팀 ELO-RATING 평균에 추가되어 계산됨
  F ) 매치 결과에 대한 값을 보고싶으면 갈색 네모칸 안의 팀 번호를 수정입력하면 알아서 계산됨

색으로 구분하는 셀의 용도!
초록색 셀 - 식별자
노란색 셀 - 자동으로 계산되는 부분
살구색 셀 - 수치를 바꿔주며 변경하는 부분

지금 주어진 문제가 한두가지가 있는데 이 문제가 안풀리고 하늘의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현재 올라가있는 문서가 최종본이라고 보면 될 것 같네요
포폴용으로 작성중인 기획서에 맞추어 셀에 메모를 해 두었으니 참고하려면 참고하시고...

안드로이드용 식물대좀비가 나왔네요 (아마존 유출버전이라고 들었음...)
인터페이스에서 모바일에 맞게 변경되고 심을 수 있는 식물의 수가 조금 줄어든 것 같습니다.
듀얼코어 CPU가 아닌 제폰(옵티머스Z)에서도 끊김없이 잘 돌아가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용량은 80메가바이트...

PC버전에 있던 미니게임들은 삭제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용량 문제때문에 없앤것 같네요
식물을 기르던 미니게임들과 퍼즐류등은 모바일에서 즐길수가 없습니다 ㅎㅎ
대신 월넛 볼링과 같은 미니게임은 게임중간중간 튀어나와 즐길 수 있습니다.





Elo-rating System이란?
Elo-rating의 기원은 체스에서 자신의 실력과 비슷한 상대를 골라
경기를 하기 위해서 Elo-rating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스포츠경기나 게임 등에서 Ranking 관련해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적누계방식(승/패에 따른 승률과 총전적을 고려하여 랭크를 산정하는 방법)의 경우보다
실력위주의 랭킹을 산정할 수 있어, 플레이어의 실력을 수치화 할 수 있는 시스템 입니다.
하지만 전적누계방식을 베재하고 Elo-rating방식만 사용하기엔 밋밋한 감이 있고,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고 목표와 만족을 줄 수 있는 전적누계방식과 혼용되어 주로 사용됩니다.

현재까지 '실력'위주의 랭크관리 시스템으로서 Elo-rating을 뛰어넘는 방식이 없다고 합니다.

Elo-rating 계산법
각각의 플레이어가 대전을 하게되면 각 플레이어간의 승률을 구하게됩니다.
각 플레이어를 A, B라고 할때, 그에 대응되는 승률 E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구하게됩니다.


Eb = 1/(1+10^((Ra-Rb)/400)) ,                           Ea = 1/(1+10^((Rb-Ra)/400))

R은 현재 플레이어의 레이팅 점수입니다.
레이팅 점수는 플레이어의 '실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으며,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수준은
임의값으로 나타냅니다. 보통 1000이나 1200이 되겠습니다.

만약 위의 공식을 적용해서 계산해보면,
만약 A플레이어가 B플레이어의 Rating점수가 같다면 승률은 50% 즉 0.5가 됩니다.
A가 B보다 레이팅이 400점 높다면, Ea는 약 0.9090, Eb는 약 0.0909가 나옵니다.
A플레이어가 이길 확률이 약 90%, B플레이어가 이길 확률이 약 10%정도 됩니다.

두 승률을 합치면 (Ea+Eb = 1) 100%가 됩니다.

이것으로 승률을 구하면, 승점변수 S와 환경변수 K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실제 레이팅의 변화량을 구합니다.

Ratingnew = Ratingold + K * (Sa − Ea)

승점변수S는 간단합니다.
이겼다면 1, 졌다면 0, 비겼다면 0.5입니다.

환경변수K는 레이팅 점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을 숫자로 나타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체스라면, 레이팅 점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K가 작아집니다.
덕분에 2500점 정도에서 레이팅은 정지한다고 하네요.

축구의 경우 경기의 비중을 고려해서 K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친선경기라면 10점, 월드컵 결승은 60점 이런식으로 주어지는데,
실제로는 거기다 골 득실차를 적용해서 정하기 때문에 조금 더 복잡하다고 합니다.
게임의 경우 해당 게임에 맞추어 이 환경변수K에 변화를 주어 특성에 맞추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식을 바꾸게 되면 여러가지 문제점이 생긴다고 하네요 (인플레이션과 같은...)

잘 이해가 안간다면 대입을 해 보겠습니다.
새로운 유저(기본값 1200)레이팅1600유저와 친선경기(K=10)를 하여 승리(S=1)를 했다고 가정하면

먼저 승률 Ea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1/(1+10^((Rb-Ra)/400))에 대입을 합니다.
Ea = 1/(1+10^((Rb-Ra)/400))
Ea = 1/(1+10^((1600-1200)/400)) = 0.0909....

Ea값을 구했으면 Rating 공식에 대입을 하여
Rating.new = Rating.old + K * (Sa − Ea) 공식에 따라
갱신될 레이팅 점수 = 1200 + 10 x (1 - 0.09) 가 되겠습니다.
이를 계산해본다면 새로운 유저의 갱신된 레이팅점수는 1209.091 이 나옵니다.

승률이 90%(0.9)인 사람은 이겼을 때 K의 10%(0.1)을 획득하고.
반대로 승률이 적은 사람이 이겼다면, 레이팅 점수가 많이 오른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ELO rating system의 약점
자신보다 레이팅이 높은 사람과 싸워서 이기면 레이팅이 많이 오르고, 만약 진다고 해도
조금 밖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에 익숙해져 어느정도 Rating점수에 도달한
유저들은 Rating점수를 관리하기 위해 대전 상대를 선택 가능한 경우, 자신보다 레이팅이 높은 사람 하고만 싸우려고 합니다.

게다가, 게임이 오랫동안 거듭될수록 상위층의 레이팅은 그 아래 있는 사람들과 격차가 벌어지며 레이팅 인플레이션 현상이 벌어집니다.
유저의 실력이 전체적으로 올라가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격차가 벌어질수록 후발주자가 초기진입유저를 이기고 더 높은랭크에 오르기는 점점 어려워 지게 됩니다.
따라서 LOL같은 경우 이러한 인플레이션을 없애기 위해서 시즌별로 Rating점수를 초기화 하는 식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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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디서 스크랩했는지는 기억이 안나고....
외장하드에 담겨있던 자료


온라인게임 Mayple Story가 FACEBOOK 소셜게임에 입점했다.
지인을 통해 시드를 발급받아 클로즈베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래픽이 상당히 깔끔하다.
조작은 마우스로만 해야한다는것이 불편하긴 하지만...
좀더 해봐야 자세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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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최근 많은 국내 게임들이 AOS장르라 하며 개발되고 있고, 또 국내에 숨은(드러나지 않은) 매니아층이 굉장히 많이 형성되어 있는 게임의 장르이다. 보통 매니아 라고 하면 소수의 어려운 게임을 즐기는(2000년대 초 FPS장르를 즐기던 사람들처럼) 사람으로 평가하기 쉬우나 이 AOS장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AOS장르? RPG 같은 것일까?
RPG가 Roll-Play Game의 약자인 것 처럼 AOS 란 Aeon of Strife 의 약자로 AOS라 부른다.
그럼 Aeon of Strife 는 무엇인가? 뭔가 게임의 장르로 치부하기엔 용어의 명칭이 어렵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Aeon of Strife 란 Starcraft(블리자드의 게임)의 유즈맵으로 많은 수의 유닛을 조정하는 RTS게임의 틀을 깨어 버리는 혁명적인 MOD(변형게임)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게임은 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 비슷한 많은 게임들의 가장 기원이 되는 게임이라 게임의 명칭이 장르로 굳어졌다고 할 수 있다.

AoS장르는 어떻게 발전하였나
흔히들 AoS 장르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을 해 줄때에 "DoTA나 카오스같은 게임이다."라고 설명 해 주는 것을 경험하거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DoTA(이하 도타)와 카오스 두 게임 모두 Warcraft3의 유즈맵 게임이다.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 배틀넷을 한번이라도 접속 해 본 사람이라면 유즈맵 게임만 즐기는 유저들이 무시할 수 없을만큼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DoTA부터 설명을 해 보자.
DoTA는 Defence of The Acient 의 약자로 흔히들 도타 라 줄여 부른다.

도타는 AoS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Warcraft3 유즈맵이다.
도타는 EUL이라는 유저 개인이 만든 맵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개발을 중단하게 된다.


CHAOS란 DoTA의 사건 이후로 만들어진 국내 유즈맵이다.
한국인에 맞추어 제작하였기 때문에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한국인에게 가장 유명한 AoS게임으로 군림하게 된다.

카오스는 최초 도타-카오스의 이름으로 ANA클랜(워3길드)에 의하여 제작이 되었으며, 초고수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가 만들 당시 여러가지 스킨및 스크립트를 무단도용해서 조합하는 이른바 짬뽕 식의 제작을 단행하였고 많은 유저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후 초고수라는 유저는 원제작자인 EUL에게 제작 허락을 받게 되는데, EUL이 이미 퍼져버린 DOTA맵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기쁨 보다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초고수는 많은 비난으로 결국 맵제작에서 손 때기로 결심하고, 한가지 목표를 공개했다.
바로 카오스의 정식버전인데 모든 스킨에 출처를 표기하뭐 맵 반전 등을 했다고 한다.
(자세히는 모르겠다)
이후로 다른 제작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켜서 지금의 카오스가 있다고 한다.


AoS의 발전은 위 두 게임의 선풍적인 인기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워크래프트3를 벗어난 독자 플랫폼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도타의 영향을 받은 대표작 몇개를 뽑아보자면 이렇다.

Demigod
Developer: Gas Powered Games
Genre : Dota Based
Released: April 14, 2009
Country : Unknown



League of Legends
Developer: Riot Games
Genre : Dota Based
Released: October 27, 2009
Country : America




Heroes of Newerth
Developer: S2 Games
Genre : Dota Based
Released: May 12, 2010
Country : America



Dota 2
Developer: Valve Corporation
Genre: Dota Based
Release Date: 2011 (Valve Time)
Country of Origin: America



Blizzard Dota
Developer : Blizzard Entertainment
Genre : Dota Based
Release Date Date :- October 23, 2010
Country : America


AVALON Online
Developer : Wemade Entertainment
Genre : AoS
Release Date Date : Jan 3, 2009
Country : South Korea


AOS장르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Riot Games의 LOL이 2년 전 부터 한국출시를 준비하고 있으며(파트너 회사를 찾는 과정에서 NC Soft가 지목 되었었으나 후에 직접 지사를 설립한다고 방향을 바꾸었음) 2011년 6월 현재 던전앤파이터로 유명한 네오플(넥슨)의 싸이퍼즈가 오픈베타 중이며, 판타그램(블루사이드)의 Kingdom Under Fire의 사용권을 획득한 드래곤플라이가 KUF Online이라는 이름으로 클로즈베타 신청을 받고 있다.
KUF온라인은... 한게임에서 블루사이드와 계약한 KUF2와 이름이 겹쳐 어떻게될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하다.

AOS장르는 과거 FPS장르처럼 소수의 매니아층 을 형성하여, 유저들이 스스로 주변에 전파하며 유저층을 확대해 나가 발전하게 되어 인기를 끌고있는 경우이다.
이와같은 문화는 하나의 트랜드로 자리잡으며 향후 몇년간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또 어떤 AOS장르의 게임이 나오고 어떤 식으로 경쟁을 하게될지 기대된다.


프리스타일로 유명한 JCE에서 소셜게임을 만들었네요
안드로이드 마켓 뒤적이며 할만한 게임 없을까 하다가 찾았습니다.
퀄리티가 상당하네요 ㅠ.ㅠ 그동안 할만한 게임이 없어 앵그리버드만 하고있었는데...
여러가지 버그와 최적화가 "아직" 덜된것만 빼면 밝은 분위기의 기분좋은 게임입니다.


JCE로고 실행하면 나옴...


게임의 로고입니다.

apk만 설치한다고 해서 인스톨이 완료가 아닌가봐요 최초실행시 인스톨을 합니다.


대기화면... 화면이 꺼졌다가 키거나 홈스크린 넘어갔다오거나 하면 튀어나오는 화면입니다.


드디어 첫 실행... 하늘에 떠있는 섬에 아담한 자신만의 마을을 꾸미게 설정되어있네요

구름으로 뒤덮여있고 동심을 자극하네요 (난 26살인데...)



이 게임은 안드로이드와 아이폰 모두 지원합니다.
안드로이드마켓과 앱스토어에서 "rule the sky" 를 검색하면 다운받을 수 있구요
현재 안드로이드는 버그인지 마켓에서 다운로드가 불가능합니다.
(티스토어에서 검색하면 koke님 께서 올려주셨더라구요...용량은 31MB)
다운받고 자세히 안보고 무작정 실행해서 추가했더니...
koke님을 추가한게 아니라 koka님을 추가했었네요...

이 글을 저장하고나면 수정해야겠습니다 ㄱ-



아무튼 이런 문제점들이 수정되고 나면 FACEBOOK의 소셜게임 못지않은 멋진 게임이 될 것 같아 보입니다. 이제 시작한지 몇시간 안되 컨텐츠를 다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게임의 컨셉과 분위기가 아기자기하고 깔끔해 기분좋은 게임임은 틀림없습니다.
BGM도 밝아 기분이 좋아지네요

개인적으로 아류 게임들을 싫어하는 편인데...
(그래서 파파야팜, 레스토랑 스토리같은 게임도 5분하고 지웠음...)
방식은 팜빌로 시작된 농장및 꾸미기와 같으나 컨셉이 하늘섬이고 그래픽 분위기도 깔끔해서
이 게임은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것 같습니다.




CODEMASTERS 에서 만든 레이싱 게임,

플레이 느낌은 그란투리스모에 가까운 현실성 있는 조작을 요구한다.

옵션에 가이드 설정으로 길을 알려주거나 어시스턴트(코너 돌 때 잘 돌 수 있도록 자동 조향 보정이나 자동감속) 설정으로

게임의 조작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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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FACEBOOK 게임인 MafiaWars를 하고 있습니다.

이 게임이 재미있는게 웹 게임의 형태를 띄고있고, 친구가 많을수록 마피아의 규모가 커진다는 것이다.
레벨업 마다 공격력, 방어력, 체력, 에너지, 스테미너 중 선택해서 올릴 수 있고,
상대방을 공격하여 돈을 뻇어오는 식으로 진행이 된다.
또 Job이라는것이 있어 에너지를 소모해서 돈과 경험치를 벌기도 하고
Properties를 통해 구역을 늘리고 돈을 걷기도 한다.

아직 컨텐츠를 모두 해본것이 아니라 어떻다 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게임이다.

이 게임을 하려면 FACEBOOK 계정이 필요하며
http://apps.facebook.com/inthemafia/
이 주소로 가면 플레이를 할 수 있다.

FACEBOOK에서 "Oh-Sung Keum"으로 검색해서 추가 하시면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친구가 몇명 없어서 매번 털리네요 많이 추가해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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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ot Games 의 League of Legends 입니다.
오늘 7월 14일 새벽 (한국시간) Season 1으로 업데이트가 되었는데
UI 가 바뀌고 새로운 모드 두가지가 추가되었네요

AOS(카오스류)장르를 선호하는편은 아니었지만 LOL은 정말 재미있게 하고있습니다.
워크래프트3의(RTS장르 특유의) 화면을 빠르게 이동시켜야 하는것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그냥 접었는데, LOL에서는 이런 유저들에게 더욱 편한 인터페이스를 제공해서 쉽게 적응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이번 시즌1을 맞아 CG영상이 공개 되었는데 기존 게임의 (캐릭터 별)스토리와는 별로 연관이 없게 만들어진 것이 아쉽지만, 메인스토리를 따르고자 하는 것이 보이고 영상이 화려해 게임을 하고싶어질 만큼 잘 만들어졌네요

게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이곳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공식 홈페이지    : http://www.leagueoflegends.com/
한국 팬 포럼      : http://lol.er.ro/
LOL네이버 카페 : http://cafe.naver.com/lol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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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평소 니드포스피드 시리즈를 굉장히 재밌게 했던 저는 NFS:W 오픈베타 소식을 (늦게)접하고 부랴부랴 설치하고 접속을 했습니다.

그래픽은 굉장했지만 아직 미숙한 부분도 많이 보였습니다. (버그도 좀 많았고)
기존 NFS 시리즈 들의 맵을 혼합해서 World 의 맵을 구성하여서 상당히 많은 추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ex) 핫퍼슛2의 맵과 Most Wanted 의 맵 혼합, 밝은느낌의 Underground2 맵 등등

모드는 써킷, 스플린터, 퍼슛(경찰차 때리고 도망가기) 세개의 모드만 할 수 있었고 월드맵에
카메라 모양 아이콘이 있어 과속카메라 촬영해서 정산하는 모드(모드이름 기억안남;)인줄 알았으나... 사람들과 모여서 스크린샷을 찍을 수 있는 곳 이었습니다 ㄱ-

차들은 Tier 1, 2, 3 으로 구분되어있고 티어에 따라 넷플레이에서 만나는것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아는사람들과 넷플레이는 차 등급 구분이 없으나, 등급이 차이나면 성질나더라구요 (못따라감...)
게임 진행은 언더그라운드 처럼 맵에 표시되어있는곳에 가면 시작할지 안할지 묻는 창이 팝업되고
모드를 골라서 진입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차 구매는 등급별로 레벨제한이 있었습니다.
(캐시로 차 랜트도 가능)

7월 27일날 오픈한다고 하니 레이싱게임 좋아하시는분들은 한번 접속해보세요!
(저처럼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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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ecution의 사전적 의미는 실행, 집행, 사형집행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게임을 실행 해 보면 한 사람이 밧줄에 묶여있고, 게임을 실행한 유저는 마우스를 이용해서
FPS게임에서 처럼 조준점을 움직이게 됩니다.
이를 이용해서 유저의 행동에 따라 승리와 실패가 결정 됩니다.

승리 실패 조건은 스포일러기 때문에 하단에 적어 두겠습니다.
게임을 한번 플레이 해 보고 보시기를 권장합니다.

Execution은 과로사(카로시)를 만든 개발팀이 만든 게임(?) 입니다.
게임을 실행하면 아래와 같은 경고문을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을 실행하면 보이는 화면입니다. 스페이스바를 누르면 넘어갑니다.-
- 게임에 들어가면 이 화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변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두가지 화면중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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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래도 1차원 테트리스 입니다. -.,-

플레이 방법은

Pressing down arrow key makes the blocks fall down faster.
랍니다.

1차원이어서 점으로 이루어 졌다기 보다 축이 하나밖에 없네요 - ㅅ-)
어찌보면 발상의 전환 입니다.
(왜 만들었을까 ....)

이곳에 가면 할 수 있습니다.
http://www.tetris1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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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by: Connect2Media
Action - 0.38 MB
Download URL - http://store.ovi.com/content/24834



The award winning graphics and gameplay in EDGE has you guiding your cube around a maze of moving platforms and shapes with either your finger, phone keys or by tilting your phone to direct the flow of your cube (depending on handset).


Symbian Touch 용 게임입니다.
G센서를 이용해서 움직일 수 있고 터치로도 가능합니다.
S60v5 용인듯 하고 S60v3는 모르겠습니다 ( -_-)

게임 방법은 큐브를 굴려 종착지 까지 이동을 시키면 되는 게임입니다.
EDGE 타임 이라는것이 있는데 발동조건을 모르겠습니다 ( -_-);;
아무튼 정산때 EDGE 타임이 길면 길수록 소모된 시간을 깎을 수 있네요

제 익뮤에도 재미있는 게임들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네요 ㅎㅎ
아이폰처럼 아이디어 폭발하는 게임들이 심비안에도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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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은 TAITO 에서 만들어졌으며 超・ちゃぶ台返し!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超・ちゃぶ台返し!를 번역하면, 초! 밥상뒤집기! 라는 뜻이며
일본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밥상을 뒤엎어버리는 것을 게임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정말.. 대단한것 같습니다.)



게임 방법 : 밥상을 친 후, 힘차게 밥상을 들어올린다!


뭐 이런거...

재미있는점은 밥상을 뒤집었을 때 밥상 위에 있던 물건이 날아가는 거리와
뒤집으면서 발생하는 기물 파손의 금액과 사람(영상에서는 쥐)이 다친것 들이
정산이 되어 가산점이 주어집니다.
실로 엄청난 게임 입니다.



초! 밥상뒤집기2 플레이 영상
회사 상사가 날아가 떨어지고 물건이 우주로 날아가네요....

제작사: TAITO

제작사 홈페이지: http://www.taito.co.jp/

게임 장르: 아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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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고자 하는 게임은 플랜비 라고 불리는 온라인 액션 게임 입니다.

레벨이 존재하긴 하나 아이템이나 스탯이 없어 모두가 평등한 상황에서 액션을 벌일 수 있으며,
팀 포트리스와 같이 각 캐릭터들마다 특성이 있어 정신없는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인스턴트 액션 게임이기 때문에 원거리 보다는 근접 난투 형식으로 게임이 진행되며,
조작은 FPS(First Person Shooting)의 조작계를 따릅니다.

wasd를 이용한 이동, 스페이스바를 이용한 점프, 마우스로의 방향전환, 클릭으로 공격
이렇듯 FPS와 같은 조작계 덕에 쉽게 유저들은 게임의 조작을 익혀 바로 시작 할 수 있습니다.


 - 플랜비의 튜토리얼 영상 -

신기하게도 플랜비는 아이디를 생성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 시작할때 본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저장되어, 그 후로도 게속 사용할 수 있습니다.


01234


플랜비 에는 직업이 5가지가 존재합니다.
Baseball Player (야구선수)
Fire Fighter (소방관)
Rocker (락커)
Boxer (복서)
Football Player (풋볼선수)
이 5가지 직업에는 각각 특성이 있으며, 상성관계는 없는것 같습니다.
팀 포트리스처럼 확연히 다른 직업들이 존재하지만 직업에 따른 스킬 같은것이 없는게 아쉽기도 합니다.

마우스 왼쪽 클릭 - 근거리 공격
마우스 오른쪽 클릭 - 장거리 공격
으로 일단 적과 만나면 정신없이 전투를 하기 때문에 왼쪽 클릭을 난타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 -_-);;

플랜비는 외국게임임에도 불구하고 한글 입출력이 깨지지 않고 잘 되며,
특이하게 외국 유저는 구경하기 힘들고 한국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심지어 홈페이지에서도 한글들만 보여 한국게임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 대기실의 모습 -


심지어 방 제목까지 모두 한글로 되어있었고 플레이 하는 유저들도 한국인들 이었습니다.
(시차 때문이라고 추측을 해보았지만 늦은 밤 시간대였는데도 외국인은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 로딩화면, 모두가 OK 되야 게임이 시작된다 -


- 데스매치 답게 시작하면 3초간의 준비시간을 준다 -



- 전투 시작! 정신없이 달리고 공격한다 -


- 상대방에게 죽임을 당한 화면, 얄밉게도 죽인 상대방이 돌아다니는것이 클로즈업 된다 -


- 죽고나면 팀 포트리스 처럼 클래스를 바꿀 수 있다 -

죽고난 뒤에 10초간의 리스폰 시간을 주지만, 5초 정도가 지나면 바로 출전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게임에서 벽 뒤에있어도 상대방의 아이디가 보이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정산 화면 -


정산 화면을 보면 EXP 와 GOLD 가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레벨이 올라도 별달리 달라지는것도 없고,아이템 샵이 존재하지 않아 GOLD 가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화폐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중에 패치 등으로 아이템과 같은
컨텐츠 들이 추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어뷰징 방지를 위해 팀내 기여도와 어시스트 도 체크되기 때문에 이에따른 보상의 차별이 있습니다.
 


판에박힌 국내 온라인게임들이 질린다면 한번쯤은 해볼만 한 게임입니다.
팀포트리스의 박진감, FPS의 속도감과 조작, 정신없는 액션이 잘 어우러져 상당한 몰입도가 있습니다.
인스턴트 액션이라 오래 하면 재미 없어 지겠지만, 가끔 가다 조금씩 플레이를 한다면
재미있게 플레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홈페이지 아트웍에는 복서, 락커가 쭉빵 여성 캐릭터인데 게임에선 모두 남자캐릭터다. orz
게임 홈페이지: http://www.planbaction.com
서비스 종류: BETA TEST
게임 플랫폼: PC ONLINE
게임 장르:    액션

권장사양
CPU - 듀얼코어 이상
RAM - 1G 이상
VGA - GeForce 6 이상
 OS - Windows XP, Vista, 7 


10.02.25 추가내용 - 업데이트

락커가 생기면서 캐릭터 코스츔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으며,

로딩화면과 대화 UI 가 바뀌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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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게임 개발자 mossmouth의 게임입니다
현재 이 게임은 엑스박스 라이브 용으로도 개발중이라고 합니다.

게임의 그래픽은 2D 도트이미지 들로 구성되어있고, 액션성이 뛰어납니다.

게임의 UI는 이렇게 구성되어있습니다!

   [↓체력]                       [↓폭탄]                    [↓로프]                    [↓소지금]

목숨은 한개만 주어지고 체력이 존재해서 체력이 다 닳게되면 캐릭터는 죽어버립니다.
하지만 죽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시작하는것은 아니기 때문에 안심(?) 하셔도 됩니다.

시작하면 키를 다 알려주긴 하지만... 안읽는 사람들을 위해...

방향키 - 이동
SHIFT - 달리기
Z - 점프
X - 공격
C - 아이템사용

↓ + X - 오브젝트 들기, 줍기
들고있는 상태에서 C를 누르면 던짐

이거 말고도 더 있는데 해보면서 배워보세요 ㅇ ㅅㅇ)/



홈페이지 : http://spelunkyworld.com/

» Download Spelunky
v1.1 (9.5 MB)

spelunky_1_1.zip

» Download the Source Code (680 KB)

spelunky_1_1_src.zip


Requires Mark Overmars's Game Maker.
Please read the
Spelunky User License before downlo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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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 주소: http://mybrute.com/
제 캐릭터랑 대결: http://bruice123.mybrute.com/

캐릭터를 만들고 자동으로 진행되는 대전을 구경하는 웹 게임.
상당히 단순하면서도 은근히 재미있네요

처음 캐릭터를 만들면 하루에 6번 대전 가능하고
다음날부터는 3번씩 가능합니다.


                      - 전부 자동으로 진행된다! 전투 걸고 커피한잔 즐기는 여유를... -

최근 My Brute 는 iPhone 용으로 어플이 나와서 틈틈히 하기 좋을 겁니다.
게임 진행방식은 풀 오토로 진행되며,
상대만 골라주면 알아서 싸웁니다. (컨트롤이 필요 없음)

특이한 점은 이 게임이 상업용 게임이 아니라는것,
해보면 알겠지만 게임에 아이템이나 스탯 같은것이 전부 자동으로 들어오고
구매하거나 할 수 있는 컨텐츠가 전혀 없다.
이 게임은 홍보용 게임으로 하루 3회 전투를 부여하고
그 외에는 자사 홈페이지에 있는 다른 게임을 즐기도록 하고있다.

참 신선한 게임
(네이버 블로그로 부터 포스트이동 하는것을 깜빡 잊어 이제서야 포스팅)

국내에는 정보가 많이 부족한 편이니 스킬이나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구글링을 조금만 해도 많은 정보가 나올 것이다. (다만 영어가 많다. 많이 어렵지 않음)
게임을 많이 해 본 사람이라면 별다른 문제 없이 이름만 봐도 대충 감이 올 것이다.


- 모든 아이템과, 모든 스킬과, 모든 펫 (직접 제작) -

국내에는 정보가 많이 부족한 편이니 스킬이나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구글링을 조금만 해도 많은 정보가 나올 것이다. (다만 영어가 많다. 많이 어렵지 않음)
게임을 많이 해 본 사람이라면 별다른 문제 없이 이름만 봐도 대충 감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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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아 5800 (익뮤) 게임 Uniwar
턴제 전략 게임입니다.


상대방과 번갈아 가며 한번씩 턴을 주고받으며 진행하는 게임입니다.
턴제로 되어있는 스타크래프트 같네요

굉장히 재미있어요
혼자 컴퓨터랑 할수도 있고
친구들과 폰하나로 돌려가며 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넷플레이 가능합니다.

PC SUITE 에다가 그냥 넣으시면 됩니다. 인증 안해도 설치 됩니다.


Nokia Xpress Music 5800 전용 게임입니다.
다운받으면 코멘트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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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왜케 웃기지...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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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am 에서 서비스 하는 Audio Surf 라는 게임을 소개하고자 한다 '_'

리듬게임이라고 하면 비트매니아류의 노트가 내려와서 맞추는 게임도 있고,

버스트어무브의 방향키를 눌러 박자를 맞추는 게임도 있다.

오디오 서프라는 게임은 퍼즐의 요소도 있고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는것이기 때문에

곡의 속도가 빠르면 우주선의 속도도 빨라지고 곡이 느려지면
속도도 느려지는 상당히 재미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 자신이 소장하고있는 MP3 파일이나 정품음반,
심지어 음성파일로 된 강좌까지....

오디오서프에서 게임으로 즐길 수 있다 -_-;;
혹시나 해서 일본어강좌 파일을 틀어봤는데

게임을 하면서 어학공부도 같이? -_- 할 수 있을까?;;

이거 게임이 ...... 뭔가 복잡한 기분이다.


STEAM MyGame 메뉴... 게임에 빠져서 살 까봐 카스를 깔지 않았다 ㄱ-

 

오디오서프는 기존 카운터스트라이크 유저들에게는 안보인다
(따로 구매를 해야한다)

컨디션제로, 하프라이프1, 카운터스트라이크 CD-Key 를 등록한 사람은
데모판만 플레이가 가능하다

친구말에 의하면 자기도 샀다고... (하프라이프2 실버팩 구매자)

 

 


Store 에서 검색을 하면 바로 나온다.

 

가격은 9.99 달러 - ㅅ- 우리나라돈으로 만원~2만원 사이에 팔린다.

비싸다고 생각한다면 가끔 할인이벤트를 하는것 같다. 9.99 -> 3.??
이렇게 할인을 해준다

3천원~4천원 사이에 구매한 기억이 있다 -_-;

STEAM 게임을 구매하려면 외국결재가 가능한 카드가 있어야 한다.

 

 

오디오서프를 실행한 화면 상단에 www.audio-surf.com 밑의 바 같은것이 로딩바 이다.

 

오디오서프 업데이트 뉴스를 보여주는것 같다. 바뀌는걸 아직 보지 못했다 -_-;;

 

 


오디오서프의 첫화면이다!

 

오디오서프는 기본적으로 창모드로 시작된다.

스팀폴더 안에서 ini 파일을 수정하면 전체모드로 시작 할 수 있다.

정말 단순하지 않은가? 첫화면에 옵션조차 없다! 시작하거나 끄거나 고르라 이건가?!

 

 

캐릭터 선택 화면 많아보이는가? 해보면 몇개 없다

 

정말 직관적으로 잘 만든 것 같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마우스 클릭만 할 줄 안다면 게임으로 들어 갈 수 있다.

맨 위의 녹색은 Easy 빨간색은 Normal 파란색은 Hard 난이도 라고 쓰여있다 -_-a;;

난이도의 차이는 나오는 블럭이 많아지고 속도도 빠르다

 

맨 아래 [?] Ironmode 에 체크를 하게되면 리스폰이 되지 않고 그대로 게임오버가 되어버린다.

친구녀석이 나에게 이걸 소개시켜줄 땐 게임오버가 없다고 했었는데 흐음...-_-;;

 

 

마우스를 오버하면 캐릭터 설명이 나온다.

 

마우스를 올리게 되면 왼쪽에 비행선의 모양
오른쪽에는 캐릭터의 특징과 특수능력을 말해준다.

각 캐릭터마다 다른 특수능력이 있기때문에
개개인의 스타일에 따라 점수내는것이 차이가 크다

캐릭터가 많아보이나 자세히 보면 Easy
난이도의 3명(?)의 캐릭터는 미디엄, 하드 에도 있다...

그러므로 각 비행선, 캐릭터의 특수능력은 총 6가지가 되는것이다 - ㅅ-)

 

 

게임 완료조건이랑 게임 오버 조건에 대한 설명이다.

 

인터페이스 상단에 별 모양의 아이콘에 마우스오버를 하면 나오는 화면이다.

게임 완료에 대한 조건이라기보다 고득점에 대한 조건이다.

설명 아이콘이나 제목이 재미있게 되어있다.

잘 못알아듣겠다면 사전을 찾아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것을 보지 않아도 그냥 몇번 해보다보면 몸으로 익히게 된다. - ㅅ-)

 

 

옵션화면 별거 없다

 

옵션을 눌러보면 정말 별거 없다 그래픽, 사운드에 관한 설정과 마우스 속도 조절

마우스 속도와 컴퓨터 성능에 따라 옵션을 만지자

 

 



캐릭터 선택시 나오는 화면이다. 비디오클립으로 특수능력에 대해 설명해준다.

 

간단하게 선택한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특수능력이나 특징에 관한 설명이다.

 
 

 노래 선택 화면

 

자신이 소장하고있는 음악파일 전부를 게임으로 플레이 할 수 있다.
(심지어 어학 강좌까지...)

하프라이프등 STEAM 게임의 OST도 기본으로 제공한다.

CD롬도 바로 읽을 수 있기때문에 리핑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

 

 로딩화면 진행도와 무엇을 하는지 알려준다.

 

오른쪽 상단에 지금까지 플레이 하면서 곡에 대한 점수를 남긴 목록을 보여준다

하단에 캐릭터에 대한 정보와 팁을 보여준다.

 

로딩완료 곡에대한 정보를 보여준다

 

선택한 곡에 대한 정보를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그래프는 속도라고 보면 된다. (그래프가 아니라 단면도?;;)

하단 가운데 보면 메달에 관한 점수가 기록된다. 이 곡에서는 37730 포인트를 넘으면 금메달을 획득 할 수 있다.

포인트를 넘었다가 내려가면 획득을 할 수 없다 - ㅅ-) 클리어시 위의 점수를 넘어야 한다.

 

Play 를 누르면 이렇게 시작한다. 선택한 곡의 트랙이 어떻게 생겼나 볼 수 있다.

 

 

시작 직전의 화면... 이제 곧 시작된다.

비행선 조종은 키보드 asdf 와 마우스로 할 수 있다

 

 

 

 게임 플레이 방법은 그냥 블럭에 들이 받으면 된다 --;;

스크린샷으로 설명하다보니 처음부터 빠른속도로 시작하는것 같은데 처음에 트랙에서 멈춰서 시작한다.

사용자가 원할때 시작하는건 아니지만.......

처음부터 빠른곡이 아니라면 빠르게 시작하진 않는다

 

 

 

같은색으로 여러 블럭을 모으면 고득점이 가능하다.

블럭들 사이에 보너스 아이템이 있다. 전부다 파악은 아직 못했지만
그냥 몇번 해보다 보면 알 수 있다.

직관적인 아이콘으로 되어있어 처음봐도 대충 무슨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가운데줄에서 한개 더먹으면 죽어버린다 --;; ironmode 체크를 안했다면
바로 리스폰된다.

ironmode 라면 그대로 게임오버...

 

 

 

 곡에따라 이렇게 옆으로 회전하는 경우도 있다 -_-;;

 


 게임 클리어시 나오는 화면 점수와 랭킹이 표시된다 - ㅅ-);

내 아이디가 왜 0으로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_-;;

 

오디오 서프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여기서 마치고....

뭐 게임 가격도 얼마 안하니 정품을 구매하는것을 추천합니다 ( -_-)

국내에서 하는사람은 얼마 없는것 같은데,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면 그래도 꽤 많은사람들이 하고있네요

검색엔진에서 검색해 보면 불법 다운로드로 공짜로 한다는 글도 많은데...

옛날 카스가 1.5에서 1.6(STEAM) 으로 넘어가면서

Anti-STEAM 이나 뭐 그런것들이 많이 생겼었는데 지금도 있나는 모르겠네요

STEAM 에는 굉장히 재미있는 게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카운터스트라이크 오리지널도 있고, 소스에 밀린 비운의 확장팩 -,.- 카스: 컨디션제로

유출되서 다시 만들었다죠....

 Day of Defeat, Red Orchestra, Team Fortress Classic 너무 온라인게임만 하지말고

가끔은 이런 게임들도 해보면 재미있답니다.

 

뭐 그냥 간단히 소개하려다가 내용이 이상해져 버렸네요 -_-;;

결론을 내리자면 오디오서프는 신개념(?) 게임이다. 입니다

정말 특이하고 재미있고...

네이버에 오디오서프 라고 검색을 하면 플레이 동영상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관심이 있으신분은 동영상 보시면 어떤 게임이다 라고 알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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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oonigames 라는 팀 그룹(헬싱키 대학 공대생들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에서 만들어진 크레용 피직스 라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어릴적 크레파스로 낙서를 하는듯한 느낌의 게임으로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려, 공을 이동시키는 게임입니다.

게임 방법이 굉장히 단순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GDC2008 에서 인디게임을 대상으로 열리는 인디펜던스 게임 페스티벌
(IGF 2008)의 대상을 받았다는군요

 

 

 

게임 다운로드 : 다운로드1다운로드2(미러)

 

 

추가적인 레벨팩과 더 자세한 정보는 제작 블로그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http://www.kloonigames.com/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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